2018. 7. 10. 03:07

2017. 12. 30.


최임위의 최저임금제도 개선에 대한 토론회 자료를 읽고, 이것 저것 쓰다가 다 지워버렸다. 자신이 없어서. 다만 하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노동계는 올 하반기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몇몇 기업들이 1월 이상의 간격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을 월 기본급으로 전환해서 지급하는 것으로 고쳐 최저임금 위반을 피해가는 것은 "꼼수"라고.


반면 위에서 말한 토론회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노동자의 안정적 생계 계획 유지를 보장하려는 최저임금법의 취지상 장기간 노동을 전제로 산정하는 정기상여금은 최저임금의 기준임금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두 입장은 이율배반적이다. 기업들의 임금체계 조정은 민주노총 정책실장의 주장대로 최저임금의 기준에 포함되지 않아야 하는 정기상여금을 최저임금법 취지에 맞게 월 기본급의 형태로 지급하기 위한 것이다.


전체 임금액은 고정된 채 임금의 지급시기만이 달라지는 것 뿐 당장의 임금액 변동은 수반하지 않는다. 다만 최저임금 상승에 따른 임금상승의 효과가 일부 상쇄되는 점은 한계라 할 테지만, 이것을 과연 꼼수라고 비난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다.


법 위반 소지라 해 봐야 취불변 절차위반 정도가 있을 텐데, 또 "꼼수"를 운운하며 도덕주의 프레임에서 싸우는 그림은 지겹다. 한겨레는 무슨 기업이 시간외 근로를 축소해서 임금총액은 감소한 것이라는 전혀 다른 소리를 가져다 엮던데, 이런 싸움방식이 진정한 꼼수가 아닐까 싶다.


실제 노동현장이 어떤 지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사용자가 탐욕적이라며 이 악물고 욕만 하는 대신, 사용자가 임금을 올리지 못하는 지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싸워야 사회가 제대로 바뀌지 않을까.


..


어제 <내일을 위한 시간(Two Days One Night)>을 보면서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임금은 한달, 1주, 하루의 불확실성만 생겨도 삶을 뒤흔들 만큼 생계유지에 절실한 요인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최저임금의 기준이 되는 임금에 정기상여금을 포함시키자는 TF의 입장은 연간 전체 임금총액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다는 점에서 타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최저임금법 취지와 노동자의 생계 안정성 보호의 필요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차라리 상여금을 기본급으로 전환하는 것을 유도하고 최저임금의 산입대상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이 아닌가 싶다.


그게 경영학적 관점에서도 더 나은 방향이라 생각되는데, 복잡한 임금체계 단순화가 경영학계의 숙원 아니던가.

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3:06

2017. 11. 24.


숫자로 보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심하다.

지금 나고 있는 격차도 문제인데,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추세에 있다는 건 더 큰 문제인 듯.

이러니까 다 취업을 미루거나 공기업, 공무원시험에 매달리지..


-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임금 격차가 크게 나타남

500인 이상 대규모 기업과 비교했을 때 1∼4인 기업은 31.3%, 5∼9인 기업은 46.2%에 불과하고, 100∼499인 기업의 경우에도 65.9%에 그쳤음(2016년 기준)


- 500인 이상 대규모 기업 대비 임금 격차는 기업 규모가 커질수록 심화되는 추세(’07→’16)

100∼499인 : 8.3%p(74.2%→65.9%), 10∼99인 : 7.8%p(62.4%→54.6%), 5∼9인 : 5.9%(52.1%→46.2%), 1∼4인 : 2.9%p(34.1%→31.3%)


출처 : 노민선,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 국제 비교 및 시사점”, 『중소기업포커스』 제17-13호, 2017. 9. 13

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3:05

2017. 11. 14.


아프면 생각이 많아진다. 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들어 생각할 시간이 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란 게 썩 유쾌하긴 어렵다.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아픈 편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기도 했거니와, 그러면서도 운동은 좋아해 큰 수술을 세 번이나 겪느라. 한번 한번 병원생활을 겪을수록 사람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거기에 수험생활까지 겪은 나는 “긍정”이 비공식적 국시인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환영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하려는 편이다. 해서 뭐 좋을 것도 없고.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불평할 자격이 없어” 라는 태도가 체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공부하는 기간에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힘들지 않느냐 물었다. 나는 하나같이 그래도 저 정도면 편하게 공부하는 거라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실제 맞는 말이기도 하고, 이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답안이니 내가 너무 핀치에 몰려있어서 저렇게 말할 수 있을 기운조차 남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리 말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아요”가 뼛속까지 체화된 사람이다. 남자고, 이제는 어리지 않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며, 겉으로 보기에는 아픈 데 없이 멀쩡하며, 지금껏 사는 데 별 도움이 된 기억은 없지만 그럴싸한 학교를 나왔다. 심지어 집안에서는 장남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 가장 흔하게 돌아오는 반응이 “너 정도면 살만 한데 왜 그래, 참아야지.” 니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힘듦이 폭발하는 시기가 되면 거의 한 분기정도를 내내 힘들단 얘기만 하면서 보내기도 한다.


오늘은 관절염이 심각한 발목상태가 무슨 노동하는 50대 어르신처럼 생겼다는 소릴 들었는데도 버스를 서서 타고왔다. 겉으로 보면 살이 좀 쪘을 뿐 멀쩡하게 생겼으니까. 엑스레이 사진을 가방에 달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임산부석 얘기가 나올 때 이해가 갔다. 작년에 다리 질질 끌면서 신림동 다닐 때도 노인들 등쌀에 내내 서서 다녔으니까, 초기 임산부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반대로 임산부석 같은 문제에서 이 악무는 남자들도 이해가 간다. 그들 입장에선 이 사회에서 살아내는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진 않을 테니까.


나도 지금 고통을 전시하고 있지만, 고통을 전시하는 건 개인적 구제를 가능하게 할 수는 있어도 사회를 바꾸는 수단이 되기는 어렵다 생각한다.


고통을 전시하면 당장의 고통이 중화되는 기분을 느낀다. 최소한 답답함은 해소되니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다. 그들의 도움을 얻어 개인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해결책 모색이 기대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데 내 고통을 공론장으로 가지고 간다면? 정말 다양한 종류와 정도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며 손을 들고 나올 거다. 심지어 고통이란 주관적인 것이기 까지 하니.


고통이 보편적인 공감대를 사지 못한다면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누구의 고통이 더 큰 것인가를 경쟁하는 것 뿐, 타인은 커녕 자기 삶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게 최근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일어나는 양태이기도 하지 않나 싶다.


내가 지금 힘들어 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왜 저런 걸 갖고 저러나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놓인 상황요건을 100% 이해하긴 어려울 테니. 그래서 이걸 올리는 게 잘하는 짓인가 싶긴 하다. 내일 일어나서 지울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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