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0. 03:05

2017. 11. 14.


아프면 생각이 많아진다. 할 수 있는 일들이 줄어들어 생각할 시간이 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란 게 썩 유쾌하긴 어렵다.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자주 아픈 편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기도 했거니와, 그러면서도 운동은 좋아해 큰 수술을 세 번이나 겪느라. 한번 한번 병원생활을 겪을수록 사람이 냉소적으로 변했다.


거기에 수험생활까지 겪은 나는 “긍정”이 비공식적 국시인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환영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닌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하려는 편이다. 해서 뭐 좋을 것도 없고.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불평할 자격이 없어” 라는 태도가 체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공부하는 기간에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힘들지 않느냐 물었다. 나는 하나같이 그래도 저 정도면 편하게 공부하는 거라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실제 맞는 말이기도 하고, 이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답안이니 내가 너무 핀치에 몰려있어서 저렇게 말할 수 있을 기운조차 남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리 말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아요”가 뼛속까지 체화된 사람이다. 남자고, 이제는 어리지 않고,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며, 겉으로 보기에는 아픈 데 없이 멀쩡하며, 지금껏 사는 데 별 도움이 된 기억은 없지만 그럴싸한 학교를 나왔다. 심지어 집안에서는 장남이다.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은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힘들다. 가장 흔하게 돌아오는 반응이 “너 정도면 살만 한데 왜 그래, 참아야지.” 니까.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힘듦이 폭발하는 시기가 되면 거의 한 분기정도를 내내 힘들단 얘기만 하면서 보내기도 한다.


오늘은 관절염이 심각한 발목상태가 무슨 노동하는 50대 어르신처럼 생겼다는 소릴 들었는데도 버스를 서서 타고왔다. 겉으로 보면 살이 좀 쪘을 뿐 멀쩡하게 생겼으니까. 엑스레이 사진을 가방에 달고 다닐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임산부석 얘기가 나올 때 이해가 갔다. 작년에 다리 질질 끌면서 신림동 다닐 때도 노인들 등쌀에 내내 서서 다녔으니까, 초기 임산부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반대로 임산부석 같은 문제에서 이 악무는 남자들도 이해가 간다. 그들 입장에선 이 사회에서 살아내는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양보할 수 있을 정도로 녹록하진 않을 테니까.


나도 지금 고통을 전시하고 있지만, 고통을 전시하는 건 개인적 구제를 가능하게 할 수는 있어도 사회를 바꾸는 수단이 되기는 어렵다 생각한다.


고통을 전시하면 당장의 고통이 중화되는 기분을 느낀다. 최소한 답답함은 해소되니까.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다. 그들의 도움을 얻어 개인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해결책 모색이 기대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그런데 내 고통을 공론장으로 가지고 간다면? 정말 다양한 종류와 정도의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가 더 고통스럽다며 손을 들고 나올 거다. 심지어 고통이란 주관적인 것이기 까지 하니.


고통이 보편적인 공감대를 사지 못한다면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누구의 고통이 더 큰 것인가를 경쟁하는 것 뿐, 타인은 커녕 자기 삶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게 최근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서 일어나는 양태이기도 하지 않나 싶다.


내가 지금 힘들어 하는 걸 다른 사람이 보면 왜 저런 걸 갖고 저러나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놓인 상황요건을 100% 이해하긴 어려울 테니. 그래서 이걸 올리는 게 잘하는 짓인가 싶긴 하다. 내일 일어나서 지울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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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2:53

2017. 5. 10.


1. 탄핵 인용으로 결과가 거의 명약관화해보여 경쟁구도가 흥미롭지 못했고, 국민 전체의 절반 이상이 지향하는 보수성향 후보들이 시원치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77.2%의 투표율은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였다고 평가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


2. 심상정 후보는 막판 사표론과 밴드웨건 효과에도 불구하고 권영길 전 의원의 득표율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유승민 후보는 20-30대에게 많은 지지를 얻어 보수의 변화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의의를 보였다고 본다.


특히 심 후보 같은 경우에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민주당이 사표론을 들고나온 것이 그 동안 정의당에서 주장해 온 선거제도 개선의 구체적인 명분의 하나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의의라 하겠다. 상당한 선전으로 평가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


3.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도 마찬가지다. 심상정, 유승민 후보가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을 정도로 다섯 후보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다자구도에서 40%는 상당한 성과로 평가하는 게 옳다고 본다.


97년 DJ도 피닉제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40%를 간신히 넘겼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보수적 지향의 국민이 다수를 점하는 사회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4. 대통령 문재인은 잘 할거라 바람섞인 예상을 해 본다. 지난 대선 때는 욕먹을 것 같은 주제는 피해가는 샌님같은 느낌이 있었는데, 언제부턴지 욕 먹을 걸 알고도 과감히 승부수를 던질 줄 아는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평소의 점잖은 모습의 正과 최근 변화한 모습의 奇를 적절히 배합한다면 공학적 측면에서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당선이 확실시 된 후 가장 먼저 한 활동이 세월호 유가족 예방이라는데, 확실히 좌우에서 유능한 보좌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


5.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하다. 이전에는 민주주의가 무엇이 중요하냐며 공공연히 비민주주의적 행태가 벌어졌다면, 최근들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비민주주의가 행해지는 이상한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작년 총선때도 호남에 대해 똑같은 행태가 문제됐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대선때도 여전히 영남지역에 대한 지역비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투표일 직전 성소수자에 대한 비하도 만만찮았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또, 선거 직전부터 높은 득표율이 있어야 반대세력의 반대 없이 국정운영이 가능하다거나, 보수와 진보 양 반대세력의 방해로 인해 참여정부가 겪었던 아픔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들도 횡행하고 있다.


여전히 사회적 반대세력은 방해물로만 취급되고 있고, 지지자와 정치인의 관계는 아이돌팬과 아이돌의 관계처럼 맹목적 추종과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야 정권교체가 급박해서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있었겠지만, 앞으로도 비슷한 행태가 반복된다면 과연 그 사회가 지금보다 더 나아진 사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 과제를 해결해야만 정권을 누가 잡는지만 주고 받을 뿐, 아무런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정치를 벗어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 이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5년 전으로 그대로 돌아가버린다면, 다시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하우스 오브 카드 수준을 벗어나지 못 할 거라는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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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2:53

2017. 4. 26.


1. 자꾸 같은 소리를 반복하게 되는데,


계속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현재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후보가 평소에도 그것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었던 데다, 공개된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일부 지지자들은 막판에 차별에 반대한다는 말을 했던 것을 근거로 앞의 발언들조차 같은 맥락으로 한 것이라 주장하는데, 지지자도 아닌 사람들이 그 후보의 발언을 이런 식으로 선해해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본다.


2. 지금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하여는 별도의 사회적 특수지위나 이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 지향,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이나 불이익한 처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최소한의 소극적 권리보장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요인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고, 타인에게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 성적 지향이 최소한의 소극적 권리로도 보장되지 못하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한 비판이 줄 잇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텐데, 대통령 되면 그대로 성소수자를 탄압할 것 같으냐, 힐러리-트럼프의 전례가 생각이 난다, pc경찰들이 또 설친다는 등의 반응은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내가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내가 특별히 인권감수성이 높다거나 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인권감수성 어쩌고 하는 진영에서 바라보는 나는 인권감수성이 무척 떨어지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유로 최소한의 기본권이 부인되기 시작하면, 그 다음으로 내 차례가 돌아오지 말라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타인의 권리가 함부로 부인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3. 인터넷 게시판이나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보면 동성애를 혐오할 자유를 인정하라는 주장을 자주 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혐오감을 가지는 것 자체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심으로부터 외부로 말이나 글의 형태로 표현되는 순간 이는 타인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것이 되고, 충돌하는 양 권리를 이익형량해볼 때 이 경우 표현의 자유는 일정부분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4. 이건 정말 개인적인 의견인데.


적극적으로 차별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내심 동성애자들을 불편하게 여긴다거나 한다는 이유로 자기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낯선 것에 대해서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니까. 사회가 더 성소수자에 대해 오픈되고 그들과 섞여 사는 데 익숙해지면 충분히 달리 생각하게 될 기회는 올 거라 본다.


내가 성소수자는 아니라서 그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서 이 말은 조금 조심스럽지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도 있어보여서 덧붙인다.


5. 작년 메갈리아 사태를 지나면서 여성이나 성소수자문제와 같이 소수자 문제를 거론하기만 해도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인정투쟁이라느니, 보통사람들에게 논리를 강요한다느니 하는 식의 비판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소수자의 어떤 권리를 주장하는 것인지, 주장의 내용이 권리 주장 자체에 있는지, 정치인에 대한 비판인지, 일반 대중에 대한 비판까지로 넘어서 버렸는지와 같은 사안의 개별적 정당성 판단을 건너뛴 채 정체성문제로 해당 사안을 한정시켜버리는 행태는 그들이 비판하던 메갈리아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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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2:40

요즘 나는 조금은 탈정치화 된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늘 영화보기 전에 할일 없이 시간이 조금 떠서 정리해 둔 스케치정도를 공유해본다.


"혼모노"라는 말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기존에 쓰이던 오타쿠라는 말에서 한 걸음 나아간 표현으로 보인다. 그 의미가 뭔지에 대해서 엄밀하게 정의된 바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진성 오타쿠' 정도의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 오타쿠들이 꽤 많은 수 포진해 있다. 오타쿠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덕질을 하는 것처럼, 정치 오타쿠들도 다양한 정치성향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를 덕질하고 있다.


꽂혀있는 대상이 정치인일 수도, 어떤 특정한 이념일 수도, 사회문제일 수도 있다.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듣거나, 방송을 보거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열심히 하거나,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어떤 주제의 대화이든 무조건반사인 양 정치드립을 끼워넣는다거나, 몇 년째 시사일간지를 매일 읽는다거나, 뻑하면 정치에 관한 글을 쓰거나, 심지어 전공을 정치학 내지 철학으로 정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대다수 오타쿠들이 세간의 편견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문화적 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기여를 하는 것처럼, 정치 오타쿠들도 사회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여러 사회의제를 선도하고 정치인과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에 앞장선다. 어떻게 보면 박근혜 탄핵도 이들이 깔아준 판이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문제는 오타쿠를 넘어선 "혼모노"들은 여기에도 역시나 존재한다는 점이다. 보통의 혼모노들이 자신의 최애캐에게 과몰입해서 남들에게 민폐가 되는 것처럼, 정치적 "혼모노"들은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나 자기가 지향하는 정치성향에 과몰입해 남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모든 사태를 정치적으로만 평가하고, 사회와 타인들이 자기가 세운 기준에 부합하기를 강요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이다.


나라가 어떤 꼴이 되었든 간에 박근혜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4%의 진짜 "혼모노" 박사모를 비롯해서,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와 조금이라도 대립각을 세우면 우르르 몰려가 매질을 시전하는 혼모노들, 사실관계와 맥락에는 개의치 않고 일단 여성혐오라 부르고 보는 혼모노들, 인권감수성이 부족하고 미개하다는 이유로 머글들을 발 아래로 내려다보며 혀를 차는 엘리트주의적 혼모노들 등등.. "혼모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혼모노"들의 가장 큰 폐해는 그 분야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진보정치가 그들만의 리그가 되고 만 것은, 결국 "진정한 진보"니, "인권 감수성"이니 하는 잣대로 머글들을 뚜들기던 "혼모노"들이 선입견을 만들어 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 관심으로부터 진보정치를 밀어낸 결과라 본다.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는 것은 종국에는 그 분야가 축소되거나 망하는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메탈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정치는 사회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장치이고,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끌고가기에 유용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치가 망한다는 것은 사회에 미치는 폐해가 매우 매우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생활 그 자체이다. 정치라는 게 셀프공부를 요한다거나 할 정도로 별 거창한 고담준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집 앞에 빈 공터가 생겼는데 극장을 새로 지을 것이냐, 가로등을 더 설치할 것이냐, 놀이터를 더 만들 것이냐, 길을 더 넓힐 것이냐, 주차장을 더 만들 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데, 예산은 한정되어 있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아마 각각의 사람들이 처한 입장마다 원하는 결론은 다를 것이며, 무엇이 절대적인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이냐, 어떤 과정으로 선택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것이 정치이다. "한정된 자원의 분배에 대한 학문"이라는 교과서에서의 정치에 관한 정의는 바로 이런 모습을 두고 말한 것일 테다.


정치를 생활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해야 하고, 다양한 의견이 편하게 오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정치에 관한 자신의 의견과 말로 인해서 함부로 손가락질 받지 않는다, 존중받는다는 안심을 주어야 한다.


"혼모노"들은 정 반대로, 정치문제를 굉장히 특수하고 불편한 것으로 만든다. 일단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운을 뗀다. 대립을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고, 언제고 회색분자와 반대자들을 혼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치에 선입견을 가지고 거리를 두게 된다. 흔히 모임에서 "정치 이야기는 금지"라는 암묵적인 룰이 정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들은 원조 "혼모노"들 처럼 모임의 분위기를 망쳐놓기 때문일 테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가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위기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한국정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과몰입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탈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올바르게 굴러가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뿐이라는 짐도 좀 내려놓고, 우리편이라는 사람의 숲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체험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뻑하면 화내고 혼내는 대신 에둘러 말하거나, 의견을 구하고, 많이 듣는 태도를 취하기만 하더라도 많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계속 지적하는 "혼모노"들의 특징은 어떤 지향과 생각을 가지고 있냐 보다는, 어떤 태도와 형식을 취하고 있는지와 더 관련이 있다.


"혼모노"들을 보고 있자면 일상이라는 걸 경험은 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날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겠지. 이런 이유로 나 또한 나 자신의 탈정치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치로 세상 바꿔보겠다는 인간들한테 신물이 난 것도 이유중에 하나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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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8. 7. 10. 02:16

1. 

평생 외국 나갈 일 없을 거란 생각에 여권도 안 만들고 영어공부도 당연히 안 하고 있었는데, 참 감사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Soc-dem Asia와 Friedrich Ebert 재단이 네팔에서 개최한 이번 컨퍼런스의 메인 주제는 "발전과 정의를 위한 경제"였다. 그 중에서 내가 기여했던 부분은 "디지털화, 불안정성 그리고 미래의 노동"에 관한 패널토론이었다. 물론 나는 글만 쓰고 토론을 하진 않았다.



2.

좌파들끼리 모여서 하는 토론이니만큼 디지털화된 불안정노동에 관한 성토회가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기대이상으로 입체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우리는 당연히 한국에서 문제되고 있는 플랫폼 노동(긱 노동자)의 현황에 대해 다루었고, 필리핀의 교수님께서 이를 이론적으로 보강하고 대안을 제시해 주셨다. 연구자가 아닌 나는 대안제시를 할 역량은 되지 못하는데, 참 다행인 셈이다.


반면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은 노동의 디지털화가 가져올 가능성에 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사업주에게 고용되어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던 예술노동자들이 시장을 전세계로 넓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설명이었다. 이 또한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스웨덴에서 온 사람은 현역 국회의원이라 들었는데, 내 생각에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이 사람에게서 나왔다. 디지털화라는 흐름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수반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재분배 조치가 필요하다. 라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나는 역시 책임을 지는 정치집단에 있는 사람은 다르군, 한국의 진보주의자들보다 80년은 앞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듣고 있었다.


그 다음에 그가 했던 말은, 우리 당이 그것을 해낼 것이며, 스웨덴 사람들은 디지털화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80년이라니. 내가 한국을 너무 과대평가 한 것이거나, 스웨덴을 너무 과소평가하였거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3.

다음날의 토론 주제들은 젠더문제, 경제발전,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등이었다. 오후의 또 다른 패널토론 준비 때문에 거의 참관하지 못했던 점은 아쉽다. 물론 의지가 있다면 스크립트를 구해서 공부를 할 수 있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여전히 사회가 전통과 종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도의 여성인권문제 해결, 여성참정권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국가들에 남녀 동수 공천 제도 안착을 위한 논의들을 잠깐잠깐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의 최근 여성주의 논의 수준이 다시 한 번 한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경제발전 부문에서는 개발된(developed) 국가들에 의한 개발도상(developing) 국가들에 대한, 그리고 북반구 국가들의 남반구 국가들에 대한 착취문제가 논의되었다.


착취문제에 관해서는 언젠가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내가 착취문제를 가장 심하게 느낄 때는 인터넷을 통해 중국의 슈퍼리치, 푸얼다이들이 돈을 펑펑 써대는 걸 볼 때이다. 좀 뜬금 없지만, 그들이 비현실적인 생활수준을 과시할 때나 축구나 프로게임단에 돈을 마구 꼴아박을 때 나는 저 부가 얼마나 많은 중국 농민공들의 저임금 노동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중국과 같이 한 국가 내에서도 일어나지만 국제적인 범위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나의 안락한 생활도 개발도상국가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인한 저렴한 제품들의 수혜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세계의 사민주의 동지들도 포퓰리즘에 대해서는 마땅한 답들을 못 내놓고, 그저 우리의 이념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정체성 정치의 광풍이 지나가고 있는 한국이 더 앞서 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다만 한국 또한 정체성 정치에 목을 매거나 정체성 정치에 반대하는 것에 목을 메는 행태 모두를 배격하지 않고서는 과거로부터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가지고 있다.



4.

관광은 거의 하지 못했다. 원래 막 활동적인 스타일이 아니기도 하고, 컨퍼런스 앞뒤로 놀 시간을 하루씩 붙여놨는데 앞 날은 항공기 지연으로 날아가고 뒷 날은 비가 와 버려서 뭘 못 했다.


그래도 컨퍼런스 기간 동안 저녁에는 다들 모여서 술 마시는 분위기여서, 거기 끼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영어를 못하니 들었다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피상적인 체험도 좋지만, 다양한 가치관과 삶의 문제를 나눈느 정말 값진 경험을 했다는 생각을 한다.


다행히 마지막 날은 친해진 필리핀 친구들 사이에 꼽사리 껴서 여기저기 좀 돌아다녔다. 어딘지도 모르고 쫓아다녔던 두 곳이 '고카르나 공원'과 '스와얌부나트 사원'이었다.


내가 네팔에 대해 알고 있던 건 '키라트'의 모티브가 된 나라라는 정도였는데, 네팔이라는 나라는 내겐 퍽 좋은 인상을 남아있다. 사람들도 친절하고, 한국과 굉장히 다른 거리의 모습이 첫 해외여행을 보람차게 했다. 최근 네팔은 민주화가 이루어져 키라트와 같은 독재 국가가 아니라는 점도 호감도를 좀 올려줬으려나 모르겠다. 정치학개론 수업을 해주시던 교수님께서 네팔 민주화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었는데.


거리의 상점들은 1950년대와 2010년대가 공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그랬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의 교복이 유독 깨끗하다는 점이 내 눈길을 끌었는데, 이것이 네팔의 교육열을 보여주는 것인지, 카트만두의 빈부격차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5.

월드컵 기간에 나간 것이다 보니 그 덕을 많이 봤다. 심지어 독일인들과 축구를 같이 봤다는 것도. 타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보아도, 네팔 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도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축구는 처음에 아이스브레이킹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최근 문 대통령과 김정은이 형성하고 있는 남북 평화무드도. 처음 만난 외국인들은 보통 축구와 북한을 주제로 말을 걸어와 주었다. 국제면, 북한면 읽지도 않는데 짜내서 대답하느라 고생은 좀 했지만.


값진 경험이었지만 아쉬움도 크다. 조금만 영어를 더 잘했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그래도 웬만큼은 하는 줄 알았는데, 전문적인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준은 전혀 되지 못했다. 내 고용주가 자유롭게 소통하는 데에도 별 도움을 못 줬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발제문은 꽤 훌륭하게 준비했다고 자부하지만, 분량과 청자들을 고려해 꽤 많은 부분을 들어내야 했던 점도 조금 아쉽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아쉬움은 정말 오랜만에 매력적인 이성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정도일까.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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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7. 2. 9. 00:14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입장이 같을 수는 없다. 그 쪽이 더 이상하지. 민주주의 사회는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대치중인 상황을 대화, 설득, 소통, 토론 등의 방법으로 해소한다. 그러나 2016년 여름의 정의당은 그것에 전적으로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당원민주주의의 실패"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그 당시 정의당의 몇몇 활동가들은 노선이 다른 당원들을 철저히 배척하였고, 그 사태를 당은 완전히 방관했다. 내가 탈당할 때 <탈당사유서>라는 글에서 말했듯, 사람들은 이 당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살지만 당은 당원과 지지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정의당이 많은 당원을 잃고,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심상정 대표의 면전에서 작년 여름 탈당한 사람들을 대표해 질문을 던질 의무가 주어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메갈리아의 방법이 타당하냐는 것에 관하여는 제대로 된 논쟁조차 이뤄지지 못했지만, 민주사회의 정당이 당권을 가진 당원들의 뜻을 수용하거나,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득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명약관화하다. 나는 정의당이 왜 이 책임을 방기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심상정 대표는 내가 이 질문을 던지기 이전부터 계속 작년 여름의 탈당사태는 모두 대표인 자신의 책임이며, 탈당한 사람들 하나 하나가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고, 죄송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 사태를 다룸에 있어 정의당과 대표인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듯 했다.


그는 마치 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조기에 깨닫지 못하고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누차 반복해서 표현했다. 이 부분에 대해 갖고 있는 아쉬움이 큰 것으로 보였다.


그 자신이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으며, 당원들과의 소통의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하나씩 열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혐오문제는 연대로 극복해야 하며 정의당이 거기에 앞장서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 또한 역설했다. 


나에게는 심상정 대표의 이런 이야기가 퍽 진솔하게 와닿았다. 우선 정치적 실패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고 그 책임 또한 대표인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 때문이었다. 또, 적대적인 입장의 질문에 대해 '메갈리아와 선을 긋겠다'며 단박에 손을 들어주는 대신 연대로서 모든 혐오를 극복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은 고수하면서 그것을 소통하고 설득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방향으로 답변을 이어나간 것은 오히려 답변에 진솔함을 부여하였다.


원래 그가 내가 몹시 존경하는 정치인이어서이기도 했겠지만, 탈당자들에 대해 '우리 당의 가치를 지지하여 당에 들어왔던 사람들 중 성평등 자체를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인식을 보인 이상 실패에 대한 인정이 단순한 레토릭에 지나지는 않는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한 번 속아봤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과거 대중정당을 지향하며 과거 진보가 빠져있었던 엘리트주의와 계몽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그 신뢰를 깨버림으로서 수 많은 당원들과 대중이 등을 돌리게 됐다. 한번 잃은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처음 그 신뢰를 얻었던 때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심상정 대표와 정의당이 이전과 같은 대중들의 넓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현실인식과 함께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진솔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노력을 보여줘야만 한다. 일종의 대체재인 민주당이 상당히 선전 하고 있다는 점, 이미 한번 속아봤던 많은 사람들이 심상정 대표의 이런 말에 대해 정치인 특유의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쉬운 현실적 상황은 그 노력을 더 어렵게 할 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노력해야만 한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한번 더 믿어달라는 읍소일 뿐, 믿어주지 않는 그들에 대한 원망으로 나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최근 매체 인터뷰들을 통해 심상정 대표는 어떤 대통령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땀과 노력이 실력인 사회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답을 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없던 얘기를 갑자기 꺼낸 것이 아니라, 2000년대 제도정치권 진입 이후부터 그가 일관성있게 해온 말이다. 이러한 일관성만으로도 여전히 정의당은 차기 집권확률이 상당해보이는 민주당을 합리적으로 견제하는 입장에서라도 존재가치가 있는 정당이다. 다른 진보정당들과 달리 대중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져본 적이 있는 당이라는 점도 그 가치를 빛내는 이유 중 하나이다.


나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정의당이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심상정 대표의 반성의 진솔함을 믿고 있기에, 여전히 당적을 유지하면서 당 내에 남아있는 엘리트주의, 계몽주의적 잔재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알게 되었기에 이들을 그냥 외면하기는 어렵게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노력들을 보고, 이제는 고개를 그냥 돌려버리지는 않기를 기원한다.


물론, 고개를 그냥 돌려버리는 것은 그 사람들의 탓이 아니다. 선택할 자유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들이 고개를 돌리지 않을지 고민하고, 다시 생각해봐달라 부탁하는 것은 이쪽 사람들의 역할이다. 아, 그래도.. 좀....... 관대하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덧붙여, 인터뷰 내내 소통과 설득이라는 말을 하는 심상정 대표를 보고 있자니, 대선 출마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지금껏 매번 해온 노동의 이야기 뿐 아니라, 지난 반년간 고민해온 화두인 민주주의에도 상당한 무게가 실려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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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ein.beruf.gd
2016. 12. 9. 17:05

우리는 정치를 저 먼곳에서 벌어지는, 우리와 별 상관 없는 일인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뭐, 그럴 만도 합니다. 정치엘리트들은 선거가 가까울 때에만 국민을 열심히 찾다가, 선거가 끝나면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사실상 국민을 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을 뿐, 주권자로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국민의당이 탄핵정국을 정계 주도권 확보에 이용해보려다 전 국민적 비난을 받고 반나절만에 꼬리를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이번 탄핵정국의 "the moment"라 생각합니다. 이 순간이 없었다면 오늘의 탄핵가결은 불가능했을 거라 봅니다.


여느때 같았으면 국민의당이 판을 흔들자 이외의 야당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이 끌리다 흐지부지되는 식으로 정국이 흘러갔을 거라 봅니다. 이럴 줄 알고 국민의당 정치가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겠죠.


그러나 이번 정국은 달랐습니다. 온 국민이 이 과정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었고, 민의에 반해 사익을 추구하려던 정치가들을 직접 벌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정치가들은 민의를 본격적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이게 바로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가들을 감시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국가를 바꾼 겁니다. 대단한 인권감수성을 갖추었거나, 특별한 정치적 식견이 있는 사람이 해낸 것도 아니고, 뭘 많이 배운 사람들이 이룬 게 아닙니다. 


평소 정치나 사회에 별 관심 없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데 바쁜 사람들이 "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면서 발벗고 나섰기 때문에 광장에 수백만의 사람이 모이고, 탄핵찬성여론이 95%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거라 봅니다.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고, 박근혜대통령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국민들께서 정치를 계속 감시해주셔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당과 정치가, 언론들도 어떻게 하면 이 평범한 사람들이 정치에 어렵지 않게 관여하도록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왜 진보세력이 이번 탄핵정국에서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정치세력이 대중을 고르는 게 아니라, 대중이 정치세력을 고르는 것이라는 걸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비극적이게도 79년에 박정희대통령을 몰아냈던 것도 국민의 손이 아닌 김재규의 권총이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대통령은 다릅니다. 이번만큼은 참 나쁜 대통령이 국민들의 손에 의해 직접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60년의 4.19혁명, 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어 다시 한 번 주권자인 국민이, 평범한 사람들이 승리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


진보너머의 이름으로 쓰지 못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1. 간단히 말해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못 이겼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을 끌어내리는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고, 존재감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한 냉정한 반성없이는 이 꼴을 면하지 못할 겁니다.


국민들을 자기 틀에 가져다 끼워맞추려는 구습을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보적 정치세력들은 상황과 국민들의 니즈가 지속적으로 변하는데도 자기 하고싶은 얘기만 주구장창 해댔습니다. 미스박의 여혐논란은 물론이거니와, 윤소하 의원이 이재용 부사장 면전에 황유미씨 이야기를 꺼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전체적인 청문회의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왜 꺼내야 했는지 납득이 안 된다는 반응이 많았던 것처럼요.


2. 정치무관심층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전에 박근혜대통령을 찍었던 사람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의 일부마저 목소리를 한데 모았기에 오늘의 탄핵가결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견이 다른 상대를 설득이 불가능하다며 미리 선을 그어버리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트럼프 때도 이야기했듯, 이 사람들을 설득가능한 대상으로 취급해야 유의미한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mein.beruf.gd
2016. 12. 9. 17:04

작년에도 집회를 나갔고, 올해도 집회를 나가면서 느끼는 건데, 작년과 올해는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면면, 집회의 분위기, 심지어 경찰이 시위자들을 대하는 태도까지 굉장히 다르다. 이름은 똑같은 "민중총궐기"인데, 왜 작년이랑 올해는 이렇게 다른걸까.


나는 이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광장에 모일 때, 분위기는 더 자유로워지지만 권력은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된다.


어제, 오늘의 국민의당 사태를 봐도 사람들의 힘이 느껴진다. 전 같으면 개돼지들아 짖어라 하고 자기 권력욕을 충족시키려 노력했을 구태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엄청난 분노에 직면하고서는 반나절도 못 가서 꼬리를 말지 않았는가.


이게 평범한 사람들의 힘이다. 이들은 평소에 정치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것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나가기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각자 판단하고 생각할 능력을 갖추었으며, 여태껏 기회가 없어서 그랬지 화가 날 때는 화를 낼 줄도 안다.


탄핵국면에서 우리는 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말로만 대중, 국민을 찾을 게 아니라.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이 인류가 어떤 길을 택할 지 다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변화는 속도를 낮추고, 긍정적인 변화는 속도를 더 내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런 점진적인 방법을 고르고 선택해 온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다시 해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할 작정이라는 것이다." (Deus Ex : Human Revolution 에서)


...


DJ DOC에 관한 논쟁들을 읽다보니, DJ DOC 뿐 아니라 집회현장에서 발언기회를 가진 장삼이사들의 발언내용을 현장에서 이른바 "젠더감수성"이라는 기준으로 재단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등의 행태가 벌어진다는 말을 듣고 굉장히 놀랐다.


올해는 대오에 속하지 못하고 혼자 돌아다니다 보니 그런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내가 그 장면을 봤다면 몹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을 듯 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평가하기에도 DJ DOC의 가사는 여성혐오적 뉘앙스로 읽힐 여지는 있다. 그리고 공개적인 발언이 여성혐오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정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사안들을 다루는 방법에 있다. 여성혐오가 무엇인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잘 모르고 한 말들, 명백히 여성혐오라 규정하기 어려운 언행을 이유로 "이러이러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 것을 넘어서 아무런 맥락과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광장에서 배제되고 사과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내가 보기에 한국사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부분적인 합의가 이뤄질 정도에까지는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남녀고용평등법같은 게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본다. 그러나 무엇을 여성혐오, 여성차별로 규정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기준이 서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최근 이런 모호한 개념을 일부 여성주의자 집단이 자의적 기준으로 전용하면서 함부로 타인과 타인의 행동에 대한 선악의 가치판단을 함부로 내리고, 그 가치판단을 근거로 광장에서 배제하거나 사과라는 내심의 판단을 강제하는 등 타인에 대한 제재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이 최근들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광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우려할만 한 모습이다.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것에 대해서 제재를 하고 싶다면 그 기준이 명석판명한 진리이거나, 이미 사회적인 합의가 끝나있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의견이 '옳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선택을 요하는 수 많은 의견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정치집단이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평범한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만화가가 독자를 개돼지취급하는 것 만큼이나 멍청한 짓이다. 최소한 선의로 광장에 참여한 평범한 사람들이 제발로 광장을 등지게 만들어서는 안 되지 않겠나.

Posted by mein.beruf.gd
2016. 11. 9. 20:44

<불편함과의 전쟁>


이게 민주주의다. 대중이 스스로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기로 결정할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세상이 끝난 것 처럼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고, 개중에는 민주주의의 종언을 말하는 사람도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죄가 없다. 로저스가 쓰던 피르미누, 클롭이 쓰던 벤테케처럼, 제대로 된 사용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시민에게 불편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민은 항상 공부하고,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대의제의 경우 자신이 선출한 대리인을 감시해야 할 책임을 진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원한다. 편한 것을 추구하고, 불편한 것을 꺼린다. "다 똑같은 놈들이야, 라는 말을 하면 현실에 지쳐버린 사람처럼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아는 거 하나 없는 사람인데도 말이죠." SNS상에서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던 빌 마어의 이 말처럼 말이다. 


어렸을 때는 자유주의자들의 경제만능주의가 너무너무 싫어서, "곳간에서 인심난다(無恒産 無恒心)"는 말조차 혐오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자기 자신의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데, 어떻게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정치인들을 감시하는 한가한 짓이나 하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2000년대 후반 경제위기 이후 사람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치와 공공의 세계를 외면하고 있고, 분노와 혐오가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옳냐 그르냐를 도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공공의 일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고 해서 비난까지 받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민주주의가 부과하는 과제를 외면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록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는 어려워 지며, 그 결과 사회가 옳은 방향으로 가도록 통제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질 뿐임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아니, 사실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게 될 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본질이다. 과정의 정치체제라는. 많은 사람들이 선거결과만 놓고 좌절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선거장에서 끝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주권을 개별 시민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를 통해 아무리 그 누가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제동을 걸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미국인들에게도 절망적인 결과를 피하고 싶다면 공부, 감시, 설득을 통해 충분히 최악을 피할 기회가 주어져있다. 이 점에서 무능한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과정에 있는 한국사회는 민주주의가 살아서 작동하는 것을 미국보다 앞서 경험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덧붙여, 우리(진보주의자들)는 왜 현실의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보수에 기우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보는 언제나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변화는 인간에게 굉장히 불편함을 겪게 하는 것인데, 진보는 본질적으로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진보의 의제를 봐도 그렇다. 평등, 연대, 공생, 분배, 환경보전, 다양성지향 등등. 주로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과 사회에 관련된 것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기자신의 안위 이외의 문제를 신경쓴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한 일이다. "프로 불편러"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말일 테다. 


어떻게 불편함을 토로하는 것이 보다 더 현명한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성찰이 꽤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놓고, 한 쪽에서는 분노와 공포라는 다분히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데 반해 반대쪽에서는 내 삶과는 별 상관 없어보이는 일들에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말아라, 저건 불편하다 떠들고 있으면, 그들이 누굴 선택할 지는 다소 자명해보인다.


우리사회, 특히 2000년대 후반 경제위기 이후 전세계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지금 대안이 될 수 있는 진보주의의 과제는 이런 사람들을 단죄하거나 비웃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을 바꿔주는 것, 정치를 통해 바꿀 수 있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트럼프와, 박근혜, 그들의 지지자들, 그들만큼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무관심층을 단순한 멍청이, 혐오주의자로 취급하는 대신, 설득 가능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이상 변화는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사람들을 죄다 색출해서 사회 밖으로 내쫓아버리던지. 그러나 이게 이전의 사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osted by mein.beruf.gd
2016. 11. 2. 22:42

지난번 분수령이야기에 이은 생각을 공유해 봅니다. 전화기를 보고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다 보니, 방바닥에 이불 덮고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생각밖에 없네요.


저는 우리 윗 세대의 가치관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김성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를 "한국사회의 병폐를 집약한 인물"이라 평가합니다. 김성근의 팀에서 선수는 야구를 잘 하는 기능인으로서의 인간일 뿐, 야구장 밖에서의 인간, 인간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김성근의 언행에서 드러나듯, 그는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정당화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소수의 살아남은 선수들에게 돌아가는 연봉, 명예와 같은 과실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관을 정당화합니다.


이 설명 누구와 참 닮은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의 병폐를 집약한 또 다른 인물. 그의 치하에 있던 사회에서 하나하나의 사람은 직업인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역할로서의 인간일 뿐, 직장 밖에서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인간성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사회의 물질적 발전이라는 결과를 가지고 독재라는,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그릇된 과정을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우리 윗 세대는 당장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가치관을 허용 내지 수용하였고,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물질적 풍요의 대가로 제공한 셈입니다. 그놈의 노오오력 타령들은 이런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러한 방법론이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 항상 이 방법론이 옳다는 것을 보증해주지는 않는 법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윗 세대의 이러한 세계관은 박정희의 세계관을 계승한 박근혜의 실패에 의해 철저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같은 시기 김성근의 야구관도 철저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대는 끝을 앞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우리가 박근혜 이후의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박근혜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민주주의사회의 국가운영에 있어 민주주의적 과정을 철저히 배제했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의회는 물론 국민과의 소통을 일체 단절한 채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릴 때 주권자인 국민들에게 알려져있지도 않았고, 국민의 검증을 거치지도 않았으며, 그렇기에 아무런 견제를 받지도, 책임을 지지도 않았던 최순실 개인에게 의존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민주주의는 과정의 정치체제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무엇을 하더라도 느려터졌고, 국민들이 스스로 멍청한 선택을 내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합니다. 그러나 주권을 다수의 국민에게 배분하고 온갖 견제와 균형을 위한 장치를 마련하여,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고, 이미 벌어진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있다는 점에서 지금으로서 가능한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박근혜가 조종을 당해 실정을 펼치고 나라가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된 것 내지는, 조종당한 것이 고작 무당이었던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정이 아닌 결과를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박근혜가 조종당한 것이 그럴싸한 비밀결사였다면, 그래서 이렇게 모든 걸 손대는 족족 이렇게 말아먹어오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조금이라도 말아먹지 않은 게 있었다면, 그건 괜찮은 것입니까? 아마 그랬다면, 이런 황당한 사건에도 이 나라 국민들은 반으로 갈려서 옥신각신 싸우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참 오싹합니다.


이것은 또 어떻습니까. 마치 박근혜가 이 사회가 병든 모든 원인의 근원인 것처럼 박근혜를 증오하고, 나는 박근혜를 찍지 않았는데 왜 박근혜를 찍었던 51.6%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느냐며, 좋지 못한 선택을 했던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자문해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가 이렇게 망가진 원인이 오직 박근혜와 새누리당, 그 지지자들에게"만" 있는지. 그들만 없었다면 이 사회는 좋은 사회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인지. 그렇다면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그들을 사회 밖으로 차내야만 하는지.


이런 모습을 보면 윗 세대의 노오오력 타령에 분개하며 인간성을 갖춘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 세대이지만,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우리 윗 세대와 크게 다른 점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누굴 찍을거냐의 문제에서 끝나곤 합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의견을 나누는 법, 토론하는 법을 전혀 모릅니다. 정치를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남을 가르치려 들고, 그것을 넘어 벌하려고 듭니다. 그런 사람들이 고까운 사람들은 입만 열면 "10선비"를 찾으며 정치혐오, 반지성주의에 경도됩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결과가 있다면 그 결과가 옳은지 자문하기는 커녕,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우파들은 독재를 공공연히 옹호하지만, 올 7월 정의당의 한심한 짓거리를 보면 이건 좌파, 우파를 막론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참 당연합니다. 이 사회는 결과만 보고 달리기 바빴던 우리 윗 세대 분들이 만든 사회이고, 우리 세대는 그런 사회에서 자랐고 교육받았습니다. 극심한 경쟁사회는 어린이, 청소년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이들이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인간성을 형성할 기회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고 올바른 정치, 올바른 민주주의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관찰하고 공부해왔던 바에 따라 예상해 보건대, 이대로 우리 스스로가 아무런 변화를 하지 않은 채 박근혜를 몰아낸다 하더라도 제 2, 제 3의 박근혜가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여전해 보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가 정답이냐고 한다면,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향하는 바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과연 우리는 박근혜 이후의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볼 필요성은 충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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