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5. 04:54

8월 말 Deus Ex : Mankind Divided가 발매되었다. 트렌드에 뒤쳐질 수는 없는 것이니, 나도 2011년 발매된 전작인 Deus Ex : Human Revolution(DEHR)을 플레이하기로 했다. 신작을 살 돈은 없는데, 번들로 샀던 구작으로 기분이나 내 보려고.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내가 좋아하는 사이버펑크, 근미래적 세계관과 사이보그 기술을 중심으로 한 SF설정, 검정과 금색을 중심으로 한 시각미와 디스토피아적 분위기, 미장센이었다. 미중년 주인공도 목소리를 좀 이상하게 내지만 이 정도면 꽤 매력적으로 디자인되었다고 본다.

잠입액션적 요소, 슈터게임의 요소, RPG적 요소가 적당히 배합되어 있는 게임플레이측면에서는, 5년 전 작품임을 감안하면 꽤 괜찮은 퀄리티로 뽑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슈터 위주 플레이를 선택할 경우 사격의 타격감이 몹시 떨어지고 난이도가 급격히 증가한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잠입중심의 플레이를 플레이어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단점으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아쉬운 점은 스토리 전개부분이다. 멀티엔딩을 채택했음에도 스토리 자체는 선형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은 많이들 비판하는 지점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스토리가 선형적이더라도 평면적이지만 않다면 괜찮다고 생각하기에 이 점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맵을 샅샅이 뒤져 찾아야 하는 e북이나 해킹 가능한 컴퓨터를 통해 배후설정에 대해 숙지하지 못하면 플레이어가 중심 스토리 전개를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렵고, 스토리 자체를 굉장히 빈약하고 평면적으로 느낄 수 밖에 없도록 디자인된 것은 게임플레이를 다소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특히나 작중에서 "(신체)증강기술"로 불리는 사이보그 기술이 야기한 사회의 계급화, 이 기술의 통제를 둘러싼 옹호자와 반대자간, 기업과 정부간의 갈등과 같은 소재는 충분히 흥미롭게 풀어낼 수 있는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고 배경을 형성하는 요소로만 다뤄졌다는 점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었다.

<이하 2011년작 DEHR 스포일러>



오히려 스토리는 초중반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과 그에 기인한 신체적 특성을 중심으로 한 미스테리를 중심으로 전개되다가, 후반부에는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비밀결사체 일루미나티와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이 만든 디스토피아를 해체하려는 프랑켄슈타인박사를 저지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런 식의 서사, 특히 출생의 비밀과 일루미나티는 너무나 진부하고 예측가능한 소재인 데다 앞서 말했던 스토리 전개상의 단점들로 인해 주변부 인물들이 사실은 주인공을 뒷통수쳤다든가, 악인으로 보이는 자에게도 사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든가 하는 반전요소들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도록 만든 것은 바로 이 작품의 엔딩이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엔딩 직전까지 하고싶은 말을 중언부언 늘어놓다가 엔딩 크레딧 직전에서야 주제의식이라 부를만한 것을 던지는데, 이것의 무게가 범상치 않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멀티엔딩 시스템을 취하고 있는데, 감상할 수 있는 엔딩의 종류는 총 네 가지이다. 

1. 과학기술 발전이 인류에게 윤택한 삶을 제공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폐해들이 너무나 심각하므로, 이것을 폐기해야 한다는 일종의 러다이트주의적 결말.

2. "우리는 우리가 항상 되고자 애써왔던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과학기술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자유롭게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리버테리언적 결말.

3. "사회는 그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법과 규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면서도 "어둠속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과학기술의 통제를 일임하자는 엘리트주의적 결말.

이 세 가지 엔딩들은 나쁘지 않은 철학적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자유냐, 통제냐를 둘러싼 가치관 대립은 수백, 수천년을 이어왔음에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며, 특히 배아줄기세포, 인간복제와 같은 인간의 삶과 가치체계를 송두리째 뒤바꿀 과학기술을 인류가 어떻게 대하여야 할 지 여부는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만큼 신선하지는 못하다.

압권은 마지막인 네 번째 엔딩의 내용이다. 

4. "내가 모든 이를 위한 선택을 내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될까? 아니다. 왜냐면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이 인류가 어떤 길을 택할 지 다 함께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변화는 속도를 낮추고, 긍정적인 변화는 속도를 더 내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런 점진적인 방법을 고르고 선택해 온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다시 해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그들의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할 작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자신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기는 커녕, 자기자신의 무오류성을 확신하는 태도에 쉽게 빠진다. 나는 옳기 때문에 내 말을 안 듣는 애들한테 문제가 있다는.

그러나 그가 옳은지 아닌지는 결과를 까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믿을 뿐이다. 즉, 그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믿음에 편승해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없다면,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평범한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단순한 다수결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이성적 설득의 경쟁에 따른 결과를 말한다.

이 네 번째 엔딩이 더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이 다시 해낼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점이다. 인류의 선택이 항상 좋은 결과로 귀결되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썼듯이, "사회는 다수의 동의에 의해 움직여야 하지만, 다수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만드려면 별도의 상당한 노력을 요한다. 대중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내가 옳다고 믿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그 선을 넘어 직접 선택을 내리고, 따르지 않는 자를 벌할 만한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이 작품은 이러한 민주주의와 정치철학적 문제에 관해 굉장히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현재에도 충분히 유효하며, 모두 한 번 쯤은 생각해볼만 한 문제이다.

+) 게임의 네 번째 엔딩에는 한 가지 엄청난 결함이 있는데, 이 엔딩을 선택함으로써 그 세계의 인류가 증강기술의 존치여부에 대해 판단할 근거가 될 증거들이 모두 수장되고 만다는 점이다. 즉, 주인공은 인류가 스스로 미래를 선택하도록 하면서도 그 선택의 근거가 될 정보를 제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가장 무책임한 선택을 하는 셈이다. 이 내용은 해외 포럼에서 읽은 비판인데, 일리가 있다.


<영상은 퍼옴>


Posted by mein.beruf.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