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4. 13:41

「두통이 심할 때 감기가 왔을 때 소화가 안될 때

예로부터 내려오는 민간요법이 있다.

퇴근하기.

<이 시 봐라> 라는 웃기는 시집에서 눈에 확 들어온 민간요법이라는 시의 전문이다.

참 별거 없는 시인데 시집에는 직접 쓴 손글씨로 행이 나뉘고 삽화도 곁들여져 아주 그럴 듯 하다

글씨가 졸필이라는 게 더 인상적이고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 만성두통과 일교차 큰 날씨탓에 수시로 느껴지는 감기기운, 스트레스가 원인인 게 분명한 소화불량같은 걸로 우리는 약방이나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냥 집에 가면 된다.

기껏해야 진통제나 해열제 소화제따위 몇 알 손에 쥘 뿐인데 약방이나 병원의 불편한 공기냄새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집에가기라는 민간요법이 있어서 가벼운 몸의 이상에는 그냥 집에 가서 쉬기만 해도 저절로 좋아지는 쉬운 처방이 가능하다.

하지만 처방은 쉬운데, 실행하기는 어렵다는 게 함정.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몸이 좀 안좋을때 "저 집에가서 쉴게요." 소리를 거리낌없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철수는 오늘 하우스테라피라는 신조어를 확산시킬 방법을 모색한다. 

아픈사람 붙잡아놓고 자리지키게 해 봤자 실제적 이득도 없고 효율도 떨어지는데 우리는 개근에 집착을 한다.

아파도 약 먹고 꾹 참으며 억지로 자리지켜야 성실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예로부터 효과뛰어난 민간요법이 전해져 내려와도, 윗 사람 또는 결정권자가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말짱 황이다.

일찍 집에가서 쉬고싶은데, 그럴 수 없는 저녁. 

거리의 바람은 유난히 스산하게 느껴지고, 나태주의 행복이라는 시는 더욱 더 가슴에 사무친다.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 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Posted by mein.beruf.gd
2016. 9. 4. 13:01

http://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1509221047481&dept=115

Posted by mein.beruf.gd
2014. 9. 29. 13:4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40600115&code=940702




Posted by mein.beruf.gd
2012. 7. 9. 11:15
TV를 틀면 유명 원로 연예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보험을 들기가 만만치 않은 노년층을 상대로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는 광고의 한 대목이다. 장례비 등 자신이 갑자기 떠날 때 자식들이 떠안아야 할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 아니냐는 은근한 훈계도 뒤따른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조장하고 그 염려를 보험으로 완화시키라는 자본의 유혹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돌아보자. 과연 노인들만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가? 초등학생에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특목고나 자사고에 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고등학생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인들은 실직이나 당하지 않을지, 혹은 너무 이른 은퇴 뒤의 삶이 어떨지 염려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온통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사회, 즉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염려가 과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내일 일정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면 그는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 수가 없다. 애인을 만나 행복을 느낄 수도, 고뇌에 빠진 후배의 하소연을 들을 수도,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삶에 비통할 수도, 심지어 지금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맛을 음미할 여력조차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통째로 오늘 하루를 내일 일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일정이 끝나면 그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그치게 될까. 그렇지 않다. 내일이 되면 그는 모레를 염려하게 될 것이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현재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행복은 내일로 연기된다. 물론 그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오늘 고생하는 것은 모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 그러니까 오늘은 힘이 들지만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신념에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잠복해있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모레가 또 내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약속해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온통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매력적인 이성과의 데이트도, 근사한 지역으로의 여행도 그에게는 별다른 기쁨을 줄 수 없으니까. 또한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이다.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웃의 불안도 그에게는 별다른 느낌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를 불행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독한 자아로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우리의 사랑과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내일을 지나치게 염려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애인, 친구, 후배,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법이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 우리는 그들의 말에 화답할 수도, 그래서 사랑과 우정이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이처럼 염려는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그와 공감하고 유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항상 억압 체제는 다수의 사람들을 깨알처럼 분리시키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체제가 이런 좋은 계기를 간과할 리 만무하다. 체제는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 소수가 다수와 전면전을 벌여서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체제 입장에서 미래를 염려하는 인간의 심리는 너무나 유용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미래만을 신경 쓰면 쓸수록 우리에게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그만큼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외부의 타자와 만나고 공감할 때, 우리는 자신이 바로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는 것을. 결국 현재는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가 가능해지는 시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체제가 염려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체제는 고민하고 다시 고민한다. 염려를 어떻게 하면 더 증폭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깨알처럼 고독한 자아로 파편화할 수 있을까? 위대한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나치라는 파시즘 체제와 연루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나중에 불가피했던 일이라고 부인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일련번호 312589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진성 나치 당원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이 바로 ‘염려’, 즉 조르게(Sorge)였다. 결국 하이데거는 당시 독일인이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여 독일의 산적한 정치경제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뛰어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삶을 옥죄는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만을 염려하고 있는 독일인들이 모든 난제들을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히틀러의 약속에 환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염려가 깊을수록 파시즘적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 파시즘적 체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염려를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탄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느 사회가 얼마나 파시즘에 노출되어 있는지의 척도는 항상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염려의 정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파시즘적 체제만 인간의 염려를 증폭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파시즘보다 더 노골적으로 염려를 증폭시키는 체제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자본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불확실한 미래상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금융상품들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자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이웃들의 고용 조건을 불안하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인가? 그런 그들이 다시 미래를 염려하는 우리 이웃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연금과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염려를 증폭시키는 정치 체제나 경제 체제를 바꾸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물론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고독한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이웃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가 없다면, 어떻게 압도적인 구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체제가 증폭시킨 염려라는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완전 딜레마다. 억압 체제가 극복된다면 우리의 염려 상태는 완화될 것이다. 우리의 염려 상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를 불가능하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억압 체제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는 말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증폭된 염려 상태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염려가 전제하는 시제인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다. 사랑과 우정을 진정으로 나누고 싶은가? 이웃들과 공감과 연대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제, 즉 현재,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꽉 잡을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일러스트 | 김상민

<강신주 | 철학자>

 

Posted by mein.beruf.gd
2012. 5. 24. 10:31

파격적인 시 한 수를 소개한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김수영의 미발표 시 ‘김일성 만세’ 전문이다. 1960년 10월6일이란 날짜가 붙은 시가 쓰여진 시점은 4월혁명 직후다. 김수영은 이 시를 써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에 보냈지만 빛을 못 보았다. 내용이 너무 도발적이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래서 부인 김현경씨가 보관해오다 몇 해 전에야 ‘창작과 비평’을 통해 공개됐다. 철학자 강신주는 최근 낸 김수영 비평서 <김수영을 위하여>에서 “아마 ‘김일성 만세’를 발표했다면, 그는 1968년 교통사고로 죽기 전에 권력에 의해 교살되었을 것이다”라고 썼다.

 

강신주는 예화를 하나 든다. 2011년 한 대학에서 인문학 강의 요청을 받은 그는 강연을 대뜸 이 시 낭독으로 시작했다. 청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는 혁명 후 등장한 장면 정권이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었다. 민주당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청중의 반응을 보며 김수영이 시를 쓴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내면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허탈해졌다고 했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북한과 김일성에 관한 얘기가 불편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란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2년 전 개성공단 업체에서 일하던 안모씨가 공단 근처 김일성 동상을 참배했다가 적발돼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동상 참배가 김일성 우상화 및 체제 선전에 동조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1·2심은 이 주장을 받아들였지만 대법원은 “동상 앞에서 수초간 참배했다고 해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이 크지 않다”며 이 부분에 대해 무죄라고 밝혔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유·무죄 여부가 아닌 듯하다. 어느새 마녀사냥적 색깔론이 우리 안에 DNA처럼 내면화한 게 아니냐는 황망함이다.

<김철웅 논설실장>
Posted by mein.beruf.gd
2012. 3. 28. 10:10


ㆍ“가진 자들에게 정치 맡기지 말고 노동자가 정치의 주인 돼야”



20대 때 혁명에 빠지지 않으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도 혁명을 생각하면 뇌가 없는 사람이라 했던가. 지난 30여 년 우리 사회에서 386세대처럼 그 말에 잘 들어맞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80년대를 불태우던 20대의 혁명가들은 이제 수구기득권 세력과 경쟁하는 신흥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민주세력이자 진보세력이라 말한다. 올해 예순인 한 울산아지매가 그들에게 딴죽을 걸고 나섰다.

▲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이 우리를 대변해주진 않는다.

노동자·서민이 사람 대접받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로 가는 것이 진보다”


김규항 = 한나라당 당원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순자 = 한나라당 당원만 한 게 아니라 한나라당 지역 여성회장도 하고 관변단체인 바르게살기위원회, 경찰서에서 하는 반공멸공회 총무도 했습니다.

김규항 = 우리 사회에서 정치에 눈을 떴다는 말은 대개 한나라당, 새누리당 지지하다가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치를 지지하게 되는 변화를 일컫는데, 훌쩍 건너뛰셨습니다.

김순자 = 나이 50이 되어 노동조합을 하면서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정몽준을 존경하는 한나라당 당원이었을 겁니다.

김규항 = 울산과학대 이사장이 정몽준씨입니다. 울산엔 현대가 울산을 발전시키고 잘 살게 해준 고마운 회사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주변에서 김 선생님의 변화를 불편하게 보는 분들도 있었겠습니다.

김순자 = 부적절하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너무 빠지지 마라.” “너무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죠. 저 역시도 전엔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일도 열심히 안하고 비뚤어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만큼 좋은 사람들도 없더군요. “피를 나눈 가족도 아닌데 어떻게 남에 대한 배려심이 이렇게 많은가” 말하곤 했습니다.

김규항 =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보통의 회사가 아니라 대학이니 다를 거라 생각하셨지요.

김순자 = 처음 출근해보니 엘리베이터에 “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은 약한 자를 돕고 사랑하는 힘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지성인들이 있는 곳이 역시 다르구나 감탄했죠. 학장이나 교수들은 공부를 그렇게 많이 했으니 얼마나 훌륭할까 기대했고 내 자식 같은 학생들을 위해 청소하는 게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너무도 달랐어요.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이기주의적이고 악랄했어요.

김규항 = 김 선생님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 노동문제나 사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혼자 세상의 모든 체험을 다 할 수는 없지요. 지식을 갖는다거나 배운다는 건 그런 체험을 일일이 다하지 않고도 사회를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한데요. 우리 사회에선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김순자 = 드물지만 우리 투쟁에 관심을 갖고 드러나지 않게 음료수도 갖다주고 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을 보면 배운 사람답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엔 교수들과 마주치면 존경스러워서 인사를 받든 안 받든 제가 먼저 인사했는데 이젠 안 합니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나보다 더 무식한 사람들, 더 이기주의적인 사람들에게 고개 숙일 이유가 없지요.

김규항 = 2007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무현 정권이 비정규보호법이라는 이름의 비정규악법을 만든 후 가장 대표적인 투쟁사례로 지목될 만큼 치열했습니다. 알몸으로 저항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남자들이 끌어내는 야만적인 상황도 있었지요. 학생들이 구사대로 나선 건 참 가슴 아픈 대목이었습니다.

김순자 = 학생회에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못하겠다고 해서 그럼 가만히만 있어달라고 부탁했죠. 그런데 어느 날 500~600명이 체육복을 똑같이 입고 일렬로 죽 서서 구사대 노릇을 하더군요. 서러워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김규항 = 그간의 투쟁으로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은 전국의 청소노동자들 가운데 가장 상황이 낫다고 하지만 여전히 최저 임금을 받습니다. 앞으로의 투쟁은 어때야 할까요.

김순자 = 청소노동자들이 다 용역업체 소속이라 투쟁에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는 방법은 하나, 전국의 모든 청소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하는 것입니다. 그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김규항 = 사람은 투쟁할 때 더 훌륭해집니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내적 변화도 있으셨는지요.

김순자 = 맞습니다. 노조하고 노동운동 하기 전엔 저도 ‘한 이기주의’ 했습니다. 받는 만큼만 주고 주는 만큼 받으려고 했죠. 항상 세상이 너무 삭막하다고 불평하며 살았지만 저 역시도 그랬죠. 노조 만들고 노동운동하는 동지들과 지내다보니 내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달라지더군요. 이기주의도 없어지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제가 원래 좀 당찬 성격이라는 소릴 듣고는 살았지만 돈 많고 배운 사람들에겐 꿀리는 게 있었는데 그런 게 사라졌습니다.

김규항 = 열심히 전도하셔야겠군요.(웃음)

김순자 = 정말로 딴 세상에 사는 것 같고 새롭게 태어난 느낌입니다. 돈 많고 배운 사람들에게 꿀려 사는 분들에게 투쟁하라고, 그러면 삶이 바뀐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김규항 = 긍정적인 경험을 많이 하셨지만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과 노동운동은 걱정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김순자 = 처음에 투쟁할 때는 노조나 노동운동하는 분들은 다 고맙고 눈물 나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노동자대회에 처음 참여했을 때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금속노조 위원장이던 정갑득씨가 발언을 하는데 동지들이 그렇게 불신하고 욕을 하더라구요. 우리가 힘을 합쳐도 될까말까한데 왜 저러나 싶어서 마음이 안 좋았습니다. 그런데 노동운동에 대해 더 알게 되면서 왜 그랬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김규항 = 만 명에겐 만 개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다름’은 존중하되 운동을 망가트리는 경향에 대해선 단호해야 합니다. 그게 말처럼 쉽진 않습니다.

김순자 = 몇 안 되는 저희 노조원들도 다 개성이 다릅니다. 간부를 맡은 사람은 그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투쟁에는 잘못된 생각이나 주장도 늘 따라다닙니다. 저희 투쟁할 때도 용역업체에서 복직 연락이 왔는데 연대노조 위원장은 바로 받으면 도로 다 잘린다 하고 또 한쪽에선 연대노조 위원장이 너무 깐깐하니 민주노총에 교섭권을 넘겨라 하고 참 혼란스러운 상황이 많았습니다. 처음엔 참 힘들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성장한 것 같습니다.

김규항 = 국회의원이 되려는 것도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습니까.

김순자 = 노동자들 집회 같은 데 가면 왜 “정치는 현장으로부터”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저게 무슨 말일까 늘 의문을 갖곤 했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는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만 알았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비례대표가 되겠다고 결심하고도 마음 한편으론 그런 생각을 완전히 씻어내진 못했습니다. 각오는 했지만 이게 맞는 것일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했는데 어제 제 생각이 확 바뀌어버렸습니다.

김규항 =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김순자 = 어제 부산 지역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고신대는 노조 만든 지 3년 정도 되었다는데 노조원이 18명이더군요. 휴게실이 한눈에 보기에도 너무 초라하고 또 학교 안에서 기가 죽어있달까 눈치를 본달까 그런 게 느껴졌습니다. 제가 “청소노동자도 정치할 수 있습니다.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은 우리를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제가 국회로 가서 우리 노동자들에게 잘못하는 사람들 다 빗자루로 쓸어서 종량제 봉투에 넣어서 분리할 건 분리하고 버릴 건 버리고 깨끗하게 청소하겠습니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분들이 억수로 좋아하고 너무나 신명이 났습니다. 이분들이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구나, ‘정치는 현장으로부터’라는 말이 바로 이거구나 깨달았습니다. 내가 하길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김규항 = 정치에 대한, 진보정치에 대한 쉽고 명료한 설명으로 인용할 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사업장 동료들은 걱정도 하겠습니다.

김순자 = 언니가 없으면 우짜노 바로 탄압 당할지도 모르는데 우린 우짜노 말합니다. 그래서 정치를 하게 되면 제가 더 큰 방패막이가 된다며 걱정 말라고 했습니다.

김규항 = 용역업체 사장이나 학장이나 교직원들도 저 양반이 저러다 진짜 국회의원 되는가, 정몽준하고 국회에서 맞짱뜨는가 싶어 걱정이 많겠습니다.(웃음) 따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순자 = 청소노동자로 일하면서 내가 사람이 아니라 노예구나 싶어서 불만과 분노가 쌓여갔지만 비정규직은 노조 못하는 줄 알았어요. 노조는 현대중공업 같은 큰 회사의 노동자들이나 하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연대노조가 있다는 걸 알고 노조를 하게 되고 투쟁하게 되었죠. 10여년 동안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매일 저녁에 딸에게 시시콜콜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래서 딸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압니다. 이번에도 ‘울엄마 참 멋있다’ 하대요.

김규항 = 10년 동안 매일이면 세뇌의 결과인가요?(웃음) 굳이 진보신당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순자 = 민주당은 우리 비정규노동자들을 힘들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고려할 이유가 없고 그동안 투쟁하면서 민노당, 진보신당, 사회당이 다 연대했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민노당이 유시민 쪽과 합치면서 노동자를 대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걸 현장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합당하면서 부담이 줄었습니다.

김규항 = 민주당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들이 집권했을 때 어떠셨나요.

김순자 = 김대중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상을 떠나서 저렇게 경륜이 있는 분이 정치를 하면 얼마나 잘할까 기대가 참 컸습니다. 그런데 우리 노동자들 힘들게 하는 법 만들고 또 노무현 대통령은 전에 현대중공업과 싸울 때 와서 응원하고 했던 분인데 또 비정규 악법을 만들고 하니까 이해가 안 가더라구요. 무슨 사정이 있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디다. 그러나 무슨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 제 또래들이 이른바 386세대의 핵심입니다. 80년대에 20대였고 다들 노동자 민중의 편에 서겠다고 노동현장에도 들어가고 감옥살이도 하고 죽기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거치면서 다들 교수도 되고 작가도 되고 언론인도 되고 사장도 되고 하면서 이젠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해 일단 합치는 게 노동자 민중을 위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김순자 = 제가 지금 우리 나이로 예순입니다. 저만 생각하면 그런 분들의 주장에 적당히 동의하면서 무난하게 살다 가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젊은 사람들이나 아이들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민주화를 100년쯤 해왔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민주화로 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이명박 핑계대고 되돌리면 어떻게 합니까. 어렵더라도 민주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규항 = 그분들은 이명박 정권 교체가 민주화라고 합니다. 심지어 ‘진보집권’이라고도 합니다.

김순자 = 민주화는 노동자 서민들이 사람 대접받고 행복하게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거고 그런 사회로 가는 투쟁이 진보 아닙니까. 그런데 노동자 서민들을 힘들게 만든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게 민주화고 진보인가요. 그 두 정권이 민주화를 안 하고 진보를 안 해서 국민들이 너무 살기 힘들어지니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세웠던 거 아닙니까.

김규항 = 김 선생님과 그분들은 민주화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민주화는 새누리당이나 조·중·동이 아니라 자신들이 집권하는 것입니다. 물론 민주화의 본디 의미로 보면 김 선생님 생각이 맞습니다. 초등학교만 다닌 분이 많이 배운 사람들보다 훨씬 유식하시니 세상이 바뀌긴 바뀔 건가 봅니다.(웃음)

김순자 = 브라질 룰라 전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존경받습니까. 저보다 학벌이 못하다고 초등학교 중퇴했다고 하대요.(웃음) 세상이 다양한 만큼 정치도 다양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은 돈 많고 배운 사람들을 대변하고 저 같은 사람들은 서민과 노동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하면 됩니다.

김규항 = 우리 정치의 문제는 보수 정치인들이 부자와 권력자를 확실하게 대변하는데 진보를 말하는 정치인들은 서민들과 노동자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돈 많고 배운 사람들끼리 보수 진보로 편 갈라서 권력 싸움만 하죠. 얼마 전 한국에 온 스웨덴의 한 정치인이 자기네 나라 사람들은 총리나 총리실 청소노동자나 똑같이 대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정치인이 스웨덴에서 보수쪽 정치인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회도 옛날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김순자 = 노동자들이 돈 많고 배운 사람에게 정치를 내맡기지 않고 정치의 주인이 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변한 걸로 압니다. 우리 아이들은 꼭 그런 세상에서 살면 좋겠습니다.

김규항 = 정치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회정치만 정치가 아니라 운동도 중요한 정치입니다. 선거 결과가 무엇이든 좋은 정치 하시길 빕니다.

<글 김규항>

Posted by mein.beruf.gd
2012. 3. 9. 11:39

한병철 교수가 8일 서울 태평로의 한 중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책 <피로사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제공

ㆍ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 ‘피로사회’ 출간

“독일에서는 번아웃(burn-out·탈진) 신드롬이 유행입니다. 교수들조차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피곤에 지쳐 쓰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피곤으로 쓰러져서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 교수(53)는 저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의 한국어판 번역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집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이어 두번째로 한국에서 출간된 이번 책은 2010년 독일에서 출간할 당시 철학서로는 유례없는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현재까지 8쇄를 찍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한 교수의 책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는 이번 책의 고갱이가 ‘자유를 통한 착취’라고 설명했다. “자본주의는 상당히 영악한 시스템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착취하는 방식의 타인 착취는 한계가 있겠죠. 자유를 주고 더 많이 일하라고 부추기면 더 많은 생산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강요와 통제가 아니라 자유를 주면서 착취를 하다보니 자신은 자유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느새 그 자유는 강제가 되고 맙니다.”

▲ 현재의 피로 극복하는 길은

성과주의·자기 집착 버리고

다른 이에게 마음 여는 것


이러한 한 교수의 분석은 현대사회를 보는 독특한 시각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로이트, 푸코, 아감벤의 이론이 억압, 규율, 감시, 면역학 등과 같은 ‘부정성’에 기반했다고 본다.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를 중심으로 한 이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지금의 사회가 “할 수 있다”는 구호가 넘쳐나는 ‘긍정성’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겉으로 규제와 억압은 철폐되고 개인의 욕망이 긍정되면서 자유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성과주의라는 독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착취가 진행될 때는 착취자를 없애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착취할 때는 자신을 죽일 수도 없어요. 내가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가 되는 것이고, 쓰러져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하게 됩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이라는 큰 물결은 한국사회도 비껴가지 않았다. 한 교수는 책 서문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를 착취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책을 번역한 김태환 서울대 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한병철의 이야기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생산적인 의미를 지닌다”며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별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입시 전형 방식이 도입됐지만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내기보다는 더욱 더 복잡하고 불투명한 경쟁의 무대로 몰아가는 것이 상징적 사례”라고 밝혔다.

노력과 성공이라는 신화에 둘러싸인 사람들은 거기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좌절에 빠지고 만다. 한 교수는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피해자라고 생각도 안 해요. 번아웃 신드롬에 대해서도 쉬라는 얘기만 나오는데 일하기 위해 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노예의 쉼이고 모욕적인 것이죠.”

한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피로’ 자체에 대해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성과사회에서 피로는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성과주의적 집착을 완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아가 한 교수는 “또 다른 피로로 현재의 피로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만 생각하다가 지쳐 쓰러지는 피로가 아니라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명상적 피로가 되겠죠. 자기 속에 몰입하는 나르시즘을 극복하고 타자에게 자신을 열어나가야 우울증도 극복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렇게 다른 것을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 한 교수의 생각이다.

한 교수는 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을 공부하고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도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현재 독일 학계에 대해서도 “철학자들이 사회에 대해 관심이 없고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비슷한 학문만을 되풀이하고 있어 철학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라며 “이론이 아니라 정보만이 넘쳐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
Posted by mein.beruf.gd
2012. 2. 29. 10:12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야당 모두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저지하겠다고 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과 순환출자 금지도 공약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재벌 빵집, 재벌 순대를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재벌개혁을 통해 골목상권을 보호할 수 있을까? 별로 그렇지 않다. 먼저 요즘 경제민주화론자들이 주도하는 재벌 빵집 논란은 과장돼 있다. 재벌가의 딸이 서울 강남의 부유한 동네에 그곳 주민을 주고객으로 하는 빵집 몇 개 만든다고 해서 과연 서민 동네 빵집이 타격받을 일이 뭐가 있다는 건가?

서민 동네 빵집들은 영세 자영업자의 빵집이 아니다. 대부분 파리바게트나 뚜레주르 같은 대기업 브랜드 체인점이다. 설령 재벌가의 딸들이 앞으로 빵집 사업을 확대해 서민 동네에 체인점을 낸다고 해도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파리바게트나 뚜레주르 같은 대기업 체인점이지 ‘영세 빵집’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진보개혁 세력이 골목상권을 대기업과 재벌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려 한다면 엉뚱하게 ‘재벌 빵집’ 문제로 왈가불가할 게 아니라 파리바게트나 뚜레주르 같은 대기업 브랜드들이 체인점 가맹주들에게 요구하는 지나친 로열티 징수와 온갖 명목의 강제 판매를 비판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런 대기업 브랜드들의 횡포 문제는 빵집만이 아니라 피자집, 커피전문점 등 모든 브랜드 체인점들에도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골목상권에 가게가 너무 많다. 자영업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무려 30%인 800만명을 넘는다. 서구는 10%이고, 우리와 비슷하게 음식점이 골목마다 많은 일본도 불과 15%라고 한다.

우리 자영업자의 절반은 월수입 150만원이 되지 않는다. 실제 동네상권의 3분의 1이 적자 상태이고, 매년 30%가 파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주요한 과제는 앞으로 5년, 10년에 걸쳐 자영업자를 현재의 30%에서 15%로 먼저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 문제가 재벌가 딸이 빵집 접는다고 해결될까? 더구나 재벌개혁을 열심히 하고, 출총제를 강화해서 재벌들이 빵집이나 피자집 같은 영역에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면 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골목상권은 일반 대기업과 재벌 대기업 또는 해외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 체인점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매달 150만원도 벌지 못할 가능성이 절반이나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매년 수십만명이 수천만원, 수억원의 돈을 들여 고깃집을 차리고 빵집을 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나마 그것 말고는 달리 먹고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 든 퇴직자들은 비정규직으로라도 취업할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까닭에, 실패할 확률이 절반이라는 걸 알면서도 목숨 같은 퇴직금을 집어넣고 창업하는 것이다. 요행 하나를 바라면서.

그런데 지난 15년간 한국에서 급격하게 고깃집과 피자집이 늘었다. 왜 그랬을까? 금융기관에서, 대기업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사람들이 1998년 이후 크게 늘었고, 정규직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네상권을 보호하려면 은행과 대기업에서 여전히 횡행하는 명예퇴직을 막고 정리해고를 막아야 한다. 더 근원적으로는 그렇게 가차 없이 명예퇴직과 정규직 해고로 몰아가는 은행과 대기업들의 경영을 막아야 한다. 대주주와 경영진이 주주이익 중시 경영을 하지 않도록 자제하게 해야 하고, 만약 자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못하도록 강제로 규제해야 한다. 즉 월스트리트와 연계된 자본시장 투자자들의 투기적인 이익 추구를 지금처럼 그대로 놓아두고서는, 가뜩이나 넘쳐나는 골목상권에 또 다른 퇴직자들이 합류하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투기적인 주주자본주의를 더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잘못된 재벌개혁은 막아야 한다. 재벌을 규제하되, 주주자본주의도 동시에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월수입이 150만원 미만이고, 매년 30%가 파산해 그 일부가 노숙인으로 전락할 자영업자들에게 인간답게 사업을 접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자영업을 그만두더라도 최저생계가 가능하게끔 정부가 그들의 고용보험을 대신 납부해주고, 다른 직종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직업 재교육을 시켜주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 자식들을 위해서는 대학까지 학자금 걱정 없도록 하고, 그 노부모들을 위해서는 노후걱정 없는 연금을 만들어 줘야 한다. 그리고 실직하더라도 전·월셋값 걱정이 없도록 주거복지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서민 복지를 향후 5년,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강화해 골목상인의 수를 현재의 30%에서 15%로 줄여야 한다. 그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단계적인 부자증세 강화와 보편증세 방안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현재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자영업자들을 포함해 국민 전체를 위한 보편적 복지국가를 향한 비전의 제시, 이것이 진정으로 골목상인들을 위하는 길이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운영위원>
Posted by mein.beruf.gd
2012. 2. 28. 09:12

[남재희 칼럼] 분배의 문제는 재분배보다 중요하다

남재희 언론인 전 노동부 장관 
기사입력 2012-02-28 오전 7:59:04
살기 좋은 사회, 정의로운 사회로의 지향(志向)은 몇 단계가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운동이 먼저 있었고, 이어 경제민주화 운동이 뒤따랐으며, 그 다음으로 노동권의 형평(노사 관계의 형평이라 해도 좋으나 강조하는 뜻에서) 운동이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 같다.

영어에 '트라이어드(triad·3개 1조)'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트라이어드다. 노동문제는 역시 통합진보당에서 먼저 제기했다. 노동운동 출신인 심상정 공동대표가 노동법원 설치 등 5개 항목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런 국민적 지향에는 으레 기득권층의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포퓰리즘, 좌파 운동이 그들의 입에 올리는 상투적 용어.

대기업(재벌)을 중심으로 하고 거대 언론 매체, 용역 학자군들, 강남 부자들 등등, 비대해진 수구기득권층의 공세를 극복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보수는 '이념의 보수'가 아니라 '이익의 보수'라는 지적을 요즘 신문에서 읽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다 함께 모두 살기 좋은 사회를 이룩한다는 이념에는 보수도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다.(복지는 보수 측에서 먼저 시작했다는 것이 통설이며, 그 예로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정책을 든다.) 그런데 이익 수호라는 좁은 안목이 저항을 낳는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과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 ⓒ연합

참, MB노믹스 기획자라는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 최근 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1년 사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 걸 느낀다. 지난해 복지 얘기하면(정부 내부에서) 좌클릭,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올해는 내 얘기가 잘 먹힌다."

내 주변에서도 그랬다. 멀쩡한 사람들이 복지란 말만 들리면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하듯이 포퓰리즘, 좌파 운운을 연발했었다.

복지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제 여야 모두를 망라하여 대세는 확실히 잡혔지만, 구체적인 예산계획, 재원확보를 위한 세금 증수(증세만이 아니다. 그동안의 감ㆍ면세 문제도 있다) 등을 다뤄야 한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로는 남북 간 긴장의 완화가 여기에 관련되는 것이다. 남북 간의 긴장 완화는 그 자체로도 우리의 당면 과제이지만, 복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한다. 우선 한마디 해두고 싶은 것은, 조용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의 국회 인준을, 새누리당으로 새롭게 탄생했다는 정당이 부결시켜 버린 것이 밝은 전망을 내다보기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민주화는 여야 간 모두 표면상은 대세가 된 듯하나, 해빙기에 박빙(薄氷) 위를 걷는 듯 전혀 낙관할 수가 없다. 대기업(재벌)들은 빵가게 등은 철수하겠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보기에 국회의원이란 떼거지들이 대개가 선거자금, 정치자금(부패자금) 등으로 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에 '재벌의 X맨' 운운하며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야 모두에 재벌의 대리인들이 있다는 것은 짐작이 가는 일이고, 세계 공통의 한심스러운 현상이다. 어느 기사에 보니 미국의 경우 공화당은 석유재벌들을, 민주당은 월 스트리트를 주로 대변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헌법 119조 2항'의 입안자로 경제민주화운동의 아이콘처럼 된 김종인 씨(새누리당 비대위원)의 말이 새삼 중요한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그는 <한겨레21> 인터뷰(2월 27일 자)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는 과거에 다 나온 것이다. 효력이 있었다. 제도를 만들었으면 관철을 해야지, 공정거래법을 만들어도 제대로 집행을 안 했다. 문제는 최고 지도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다음 대통령이 중요하다."

우리의 권력 구조는 대통령 중심제다. 그리고 역사전통이나 정치문화는 그 대통령직을 거의 제왕적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가 없다. 정당이 중요하고, 국회의원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다. 정책결정은 대개 그들이 한다. 그러나 마지막 결단은 대통령에 달렸다.

"정치권력이 시장에 넘어갔다"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넋두리를 했었다. 이 시장과 정치의 경합, 재벌과 정치의 한판 승부에서 대통령이 누구이며, 어떤 역사적 사명을 느끼고, 또한 각오를 하고 있느냐는 배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연임을 위해 신경을 쓸 필요도 없는 단임제이니까 역사적 사명에 투철할 만도 할 것이다.

여하간 그런저런 사정으로 경제민주화의 실현은 아직 전혀 낙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번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국회의원 선거가,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주의를 해둘 점이 있다. 경제민주화가 반재벌이나 재벌 타도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겠다. 효과적인 경제운용을 위해서도 상생(相生)의 교통규칙을 잘 만들어 지키자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권의 형평 문제가 등장했다.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 순서이다. 경제민주화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통합진보당이 내놓은 5대 노동공약은 ① 2017년까지 노조 조직률 20%, 단체협상 적용률 50%로 확대 ② 비정규직 비율을 OECD 평균 수준인 25% 가량으로 축소 ③ 최저임금을 노동자 평균 임금의 50%까지 보장 ④ 현재 연 2200여 시간에 가까운 노동시간을 연 1800시간으로 단축 ⑤ 노동법원 설치 등으로 되어 있고 구체적인 법 개정 등도 포함되어 있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측에서도 노동 정책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종합적인 정책 발표는 되지 않고 있어 좀 더 기다려보아야 할 것 같다.

노동 세력의 정당 지지도 그동안 바뀌었다. 민주노총은 계속 통합진보당 쪽이지만, 한나라당과 정책 연합을 했던 한국노총은 그 제휴를 깨고, 민주통합당과 정책 연합 파트너를 바꾸어 새누리당은 노동 지지 세력 문제에 있어서 얼마간 곤혹스럽게 되었다. 규모는 작지만 제3노총을 지향하는 노조 세력이나 한국노총의 이탈 세력을 흡수하려는 것은 아닌지.

MB는 처음부터 '기업 프렌들리'를 내걸었는데 그것은 점차 노동 언프렌들리(unfriendly)임이 분명하게 되어갔다. 가장 눈에 띄는 케이스가 정부 산하인 노동연구원마저 원장을 장기간 공석으로 놓아둔 채 연구비를 차단하여 고사 작전으로 나아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동안 여러 가지로 합리화란 이름 아래, 노조 활동을 옥죄어 왔다.

본래 그럴 우려는 있었다. 출신 기업인 현대그룹이 지난날 어떤 곳이었던가. 제임스 리라는 전문적 노조 파괴자의 이름이 떠오른다. 노조를 인정 않으려는 무노조정책을 따르면서 일어났다 하면, 국내에서건 해외에서건 폭동이 아니었던가. 그리 오래 전의 역사가 아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 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법령을 개정할 일도 많을 것이다. 앞으로 각 당의 주장을 종합하여 법령 개정을 위한 구체적 논의가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법이나 제도의 문제에 앞선 정부 각 기관의 행태에 관해서이다. 법제 문제는 다음으로 미루고, 좀 색다른 시각에서의 이야기다.

가령 노동부('고용노동부'라고 혼란스럽게 이름이 바뀌었다)와 그 산하기구가 어떻게 법령을 해석하고 집행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법령들의 해석은 경우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어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대법원까지 가게도 되는 오랜 기간의 소송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아주 최근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란 대법원의 판결만 해도 그렇다. '정부가 친노동적이냐, 중립적이냐, 또는 반노동적이냐'하는 그 태도가 일상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다.

노동억압적 정권의 시대에는 경찰국장 출신들이 노동청장으로 계속 직행하기도 하였으며, 군 출신들이 노동부 장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노동 문제는 원만히 조정해나갈 문제가 아니라, 치안 차원에서 엄히 다스릴 문제였기 때문이다.

노동부 문제만이 아니다. 노동문제에는 경찰·검찰 등이 직접 깊숙이 개입한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친기업·반노동의 행태를 보인다. 물론 대규모 노사분규는 치안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되니 치안유지란 점에서 노동 측을 견제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전에 막강한 대검찰청의 대검 검사가 노조를 때려잡기 위해(말 그대로 때려잡기 위해서다) 함정을 파놓고 파업을 선동하였으며 제멋에 겨운 나머지 그 사실을 신나게 자랑하다가 옷을 벗은 유명한 사건이 있었지 않는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법원의 태도도 크게 문제가 된다. 노동법원 설치가 제기되는 까닭도 있다. 절차의 번잡함 때문도 있지만, 그들이 '친노동적이었느냐, 중립적이었느냐, 또는 반노동자적이었느냐'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한 것인데, 그 태도 여하도 정권의 태도 여하, 그에 영향 받은 사회 여론에 따라 흔들린다는 점은 말할 수 있겠다.

정부의 태도, 특히 대통령의 태도가 중요하다. 예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노조 지도자들을 자주 만나고 해외 여정에 재계뿐만 아니라 노조 지도자들도 동반하여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는 재계뿐만 아니라 정부기관이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대통령은 그만큼 핵심적 중요성을 가졌다. 어느 원로 정치학자는 "청와대에 출입하는 인사들과 그 빈도를 정확히 파악한다면 한국 정치를 점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이치이다.

지금 노사정 3자 위원회가 있기는 있으나,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 방식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잘 기능할 수 있을지는 얼마간의 의문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 초기 IMF 금융위기 때는 대통령이 열성을 보여 큰 역할을 했다. 노사정 간에 대타협을 한 것이다. (나중에 대량해고를 결과하였을 뿐이라고 민주노총이 후회막급이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사실상 휴면 상태이다시피 한 노사정위도 대통령이 힘을 실어 준다면 얼마간의 기여는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미국의 대공황 때 프랭클린·D·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정책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 뉴딜 정책에도 노동 정책이 큰 몫을 했다. 노동에 너그럽게 대하여 노조 조직이 대폭 늘어나고 그 결과 분배 문제에 큰 향상이 있었다. 흔히 '와그너 법(Wagner Act·1935년)'이라고 알려진 National Labor Relations Act도 그중 하나다.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을 향상시켜 노사관계에 새로운 역사의 장(章)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동에 애정을 가진 훌륭한 노동행정가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가 미국에서 여성으로는 첫 장관이 되고, 노동부를 맡아 루즈벨트 4선 임기 내내 재임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노동권의 향상과 형평', 이 트라이어드라 할 모두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복지가 주로 재분배(再分配)의 문제라면(물론 기업복지 등 직접 분배도 있지만) 노동권의 향상과 형평은 직접 분배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 분배 문제는 재분배의 문제보다 중요하다. 훨씬 중요하다. 미국에서 노동권이 향상되었던 뉴딜 이후에는 노동자에의 분배 구조가 향상되었고, 노동 억압적이었던 레이건 대통령 이후에는 분배 구조가 악화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우리도 복지국가, 경제민주화에 계속하여 관심을 갖고 열성을 기울이는 한편, 노동권의 향상과 형평을 위해서도 이제 활발한 논의를 하고, 에네르기(energy)를 집결시킬 때가 아닌지. 그런 바람이다.
 

 

/남재희 언론인 전 노동부 장관
Posted by mein.beruf.gd
2012. 2. 27. 13:19

Posted by mein.beruf.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