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10. 16:29

 5월 2일의 '이명박 탄핵'집회에는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 투표를 통해 선출되었음에도 단 2개월만에 지지율이 반토막난 위정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치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탄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이명박 정부는 개방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번 쇠고기 수입 개방은 한미 FTA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에서 시작되어 이명박 정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개방의 목적은 결국 '파급효과'이다. 일부 산업의 손실을 감수하고 다른 산업이 그 손실 이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면, 개방을 하여 그 더 큰 이익이 손해를 본 산업에까지 파급효과를 미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한미 FTA 협상에서 농업 분야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자동차 분야의 더 큰 이익을 노려 개방을 시도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파급효과'가 허상임은 대한민국 그 자신이 40년의 역사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시도했던 거점개발은 기본적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선상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면 그 주변지역으로, 거대 재벌에 집중 투자하여 중소기업으로 투자의 효과가 파급될 것이라는 예상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이 두 정책의 40년 후, 우리나라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가? 바로 극단적인 양극화다. 사회적 부와 인프라 등이 수도권과 영남권에 편중되어 전라, 충청, 강원권은 상당히 배제되어 있고, 대한민국의 산업은 대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하며 중소기업들이 그에 종속되는 기형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부가 의도적으로 일부 지역과 기업에 부를 집약시켰을 경우 양극화는 필연적으로 가속된다는 것이다.

 개방이라는 것을 하지 않을수는 없다. 세계화는 시대의 필연적인 추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아무런 대책이 없는 개방은 지양해야 한다. 개방으로 인해 손실을 입는 산업 종사자들의 생계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과, 이득을 얻는 기업들의 이익을 사회 전체로 파급시킬 거시적인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또한 협상에 더욱 만전을 기해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런 대책을 내놓기 위해서는 정부의 깊은 성찰이 필요했는데, 적시에 우리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기에, 이명박 정부가 개방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기회가 생긴 셈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깊은 성찰을 통해 서민을 위한 정부로 다시금 태어나기를 기대해본다. (사족 - 공적인 글이라 이렇게 쓴거지 사실은 기대도 안함. 그래도 벌써 탄핵을 운운하는것은 좀 아닌 것 같다.)

2007.5.3.

 (2007.5.10.에 옮기면서 덧붙임) 이 글의 끝부분에서 나는 이명박 정부가 이번 기회에 깊이 성찰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글을 맺었다. 그러나, 지난 일주일간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작태는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더 실망할 껀덕지도 없었지만.) 성찰은 커녕 비판을 유언비어로 취급하질 않나, 여론조작을 시도하질 않나.. 100분토론에 정부관료를 내보내서 동문서답이나 시키고. 휴.. 뭔가 돌파구가 안 보인다. 제일 가까운 총선도 4년이나 남았는데.

사족 - 나는 '파급효과'의 허상을 쫓는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지만, 사실 이번 협상의 결과로선 '파급될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더 절망적이다. -_-;;

Posted by mein.beruf.gd
2007. 4. 9. 15:53
 

 나는 무신론자다.

 그러나, '교회'나 '종교집단'이라는 것을, 사회학적으로 보게 되면, 상당히 흥미있는 집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종교에 관한 글을 많이 읽고, 쓰곤 한다. 이번에도 그런 나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로 글을 쓰는 것이 될 것같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01&article_id=0001482645&section_id=103&menu_id=103

 《통계청이 5월 발표한 인구통계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는 1995년 295만 명에서 2005년 516만6천 명으로 크게 증가한 데 반해 같은 기간 개신교 신자는 876만 명에서 861만 명으로 감소했다.》

...라는 데이터가 있다. 나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글을 서술 할 예정이다.



 근대사회에서 교회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보면, 위에서 인용한 기사에서 말하는 '개신교 신도수의 감소'라는 현상의 원인이 생각보다 쉽게 나온다. 그러자면, 먼저 근대사회에서 교회가 하는 '기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지.

 교회는 상당히 재미있는 집단이다. '믿음'이라는 이유로 모여서, '믿음'이외의 일도 많이 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아이들에게 축구나 악기를 가르쳐주거나, 교회가 단체로 나서서 사회봉사활동을 한다던지 하는..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 지인분들을 보면 그들 중의 대부분은 인간관계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 지역의 주민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취미생활을 함께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기능이라고 나는 본다. 교회의 기능이란 바로 그것이다. '지역사회의 구심점'이라는 것 말이다. 조지칼린이 교회를 '옷이나 자랑하러 가는 건물'이라고 희화화하여 표현한것은, 정말 현대교회의 특징과 성질, 기능을 짧은 말로서 간단하게 보여주는 구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교회의 기능이 세가지 원인으로 인해 흔들리고,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신도 수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제는 그 세가지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번째 원인은 개인주의의 확산이다. 소규모의 교회는 응집성, 단결력이 강하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굉장히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 교회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어떤 행위에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기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진 현대인들은 굳이 교회에 가려고 하지 않고, 간다고 하더라도 익명성이 강한 큰 교회로 몰리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원인은 '믿음'의 본질에서 너무 벗어나는 교회에 있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의 경우, 너무 정치적인 색깔을 내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극우익단체에는 거의 다 개신교 교단이나 교회와 관련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이것이 '정신수양'이나 '마음의 평화', 또는 단순한 '기복신앙'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코드와 크게 벗어나기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이것이 불교와 천주교의 재흥이라는 현상으로도 나타나는것이, 이 이야기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번째 원인은 인터넷의 활성화이다. 인터넷과 개신교 신도수의 감소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위에서 교회의 기능에 대해 서술했던 내용에서, 인간관계와 취미를 함께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기능을 최근에는 인터넷이 많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인간관계와 취미를 위해 가야했던 교회 대신에, 더 편하고 더 전문적인 인터넷 동호회로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원인들로 인해, 개신교의 신도수는 줄어들고 그에반해 천주교나 불교의 신도수는 늘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개신교에게 있어 무조건 부정적 요소가 될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개신교가 양적인(신도수와 그에 따른 헌금들..)성장을 해 왔다면, 이제의 개신교는 질적인(진정한 '신'을 믿는 신도들과 그에대한 연구를 할 사람들)성장을 할 발판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Posted by mein.beruf.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