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7 14:38
“집을 장만하는 것, 어렵지 않아요. 최저임금 4320원을 받으며 80년 동안 숨만 쉬고 살면 집을 가질 수 있어요.” 얼마전 <개그콘서트> ‘사마귀 유치원’에서 최효종씨가 던진 이 개그가 빵 터지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이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1일부터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시급 4580원. 지금 환율이 1달러당 1148.5원이므로 3.99달러에 불과하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연간 2000시간을 근무한다고 했을 때 연봉 8000달러 수준이니, 한국의 최저임금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비웃는다. “1만2000달러 어디 갔어, 이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사이에서 한국이 꼴찌를 다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최저임금은 OECD 평균의 절반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영국은 최저임금으로 시간당 5.93파운드(1만500원), 일본은 평균 730엔(1만900원)을 책정하고 있으며, 캐나다·뉴질랜드·아일랜드·프랑스·호주는 시간당 1만~1만5000원으로 정하고 있다.

물가와 환율이 나라마다 다르니 단순비교는 위험하다는 반론도 설 자리가 없다. 지난해 국제노동기구(ILO)가 발간한 ‘세계 임금 보고서’는 물가·환율을 고려한 구매력 기준으로 각국 최저임금을 비교하고 있는데, 한국의 한 달 최저임금(797달러)은 호주(1597달러), 프랑스(1443달러), 아일랜드(1368달러)와 비교하기조차 민망하다.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미국(1257달러)은 물론이고, 디폴트 위기에 처한 그리스(1096달러)에도 한참 못 미친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 수가 250만명에 달하고, 이조차 못 받는 노동자 수도 이에 육박한다.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이 최저임금 언저리에 걸려 있는 이 나라 정부와 보수 정치권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다. “안돼~! 최저임금 올리면 영세기업 줄도산이야~.”

참다못해 저임금 노동자들이 직접 팔을 걷고 나서기 시작했다. 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홍익대·경희대에서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이 아니라 생활임금을 달라”며 집단교섭에 나선 것이다. 이들이 노조를 결성하자 거의 예외 없이 사측 개입의혹이 짙은 복수노조가 출현했다. 줄도산한다던 업체들이 “사람 불러야 돼”라며 많은 돈 들여 노무사를 고용하기도 한다.

집단교섭을 시작한 조합원들 대부분이 50~60대 고령 노동자들인데, 비슷한 연령대의 대학 교수들 연봉과 비교해 보면 거의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대학 청소부들 노동이 교수의 노동에 비해 10분의 1 가치밖에 안된단 말인가? 해마다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공익위원 각 9명씩으로 구성되며, 노사 간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다 결국 결정은 공익위원들 몫이 되곤 한다. 이들 공익위원 9명 중 8명이 현직 교수들이라는 사실은 씁쓸하기만 하다. 시급 4달러도 안되는 최저임금을 결정한 공익위원들 연봉부터 공개하라고 해야지 않을까?

지난해 최저임금위원회 기본 회의수당이 회당 7만원에서 10만원으로 50% 가까이 인상됐다. 2시간만 회의하면 10만원을 받고, 2시간 넘으면 5만원이 추가된다. 시간당 회의수당이 최저임금의 열 배 가까이로 오른 근거는 2011년 기획재정부 지침이란다. 최저임금 인상에는 인색한 정부의 이 지침에 따라 최저임금위원회만이 아니라 모든 위원회의 회의수당이 다 올랐다고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다시 최효종씨의 개그로 돌아가 보자. “가족들과 오순도순 사는 방법, 어렵지 않아요. 4인가족 생계비 월 평균 494만원만 있으면 돼요.” 연봉 2억2000만원을 받는 대통령, 억대 연봉의 장관들, 최저임금의 몇 곱절 이상을 세비로 받는 국회의원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줄 리 만무하다. “최저시급 4580원으로 너희들이 한번 생활해봐라”며 팔을 걷어붙인 대학 청소부들. 그들이 이 부조리한 세상의 먼지들을 쓸어버리도록 우리 모두 응원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희망을 만드는 첫걸음 아닐까.

<오민규 비정규노조연대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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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eskrasia
2012/01/17 14:32






‘이른바 전통(본원)적 축적’이라는 유명한 철학명제가 있다. 즉 옛적부터 저축해 두었던 자본으로 공장을 창업한 것이니, 그 공장을 ‘보호(保)하고 지키는(守)’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자본가들의 철학이 ‘보수’라는 의미로 정착했다.그런데 이러한 ‘보수’의 정당성 주장에,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이론이 근대산업사회의 노동자 착취과정에서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축적’이란 것이 사실은 온갖 제도적 폭력(왕권, 귀족, 영주 등)으로 약탈한 결과물이라는 주장이 노동 무산대중의 가치체계로 표본화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많이 축적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재물은 욕심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소수 기득권자들의 폭력수단을 동원한 약탈을 막고, 공평하게 소유해야 한다는 이른바 ‘경제민주화 이론과 실천’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다.

폭력에 의한 약탈은 근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극렬하게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식민지배 아래서 민족국가 독립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희생한 쪽과, 일제파쇼세력과 타협하여 개인의 재산을 확장하고 ‘보수’한 불륜 집단으로 나뉜다. 일제 패망 후에 불행하게도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때문에 전통적 민족국가는 분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친일 부역하여 개인재산을 축적한 소수의 패륜집단은 미 군정시기에 친미파로 옷을 갈아입고 외세권력의 비호 아래 부정한 재화를 지칠 줄 모르고 쌓아왔다. 그들은 그 부와 기득권을 오늘날까지 확장하고 보수하고 있다.

한편 민족의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려던 세력은 좌파로 몰려 학살되거나 북쪽으로 쫓겨가기도 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독립을 실천하려던 세력은 외국지배세력과의 투쟁에서 개인이익을 뒤로하고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려는 ‘민족 이익 보수’를 주장했다.

서구국가에서는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의 이익을 개인 이익보다 우선하려는 가치체계를 ‘보수주의’라 한다. 그와 달리 우리나라 집권당의 ‘보수논리’는 일본과 미국 세력에 의지하여 개인집단의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보수라는 점을 우리 민중이 명확히 알아야한다.

이제 ‘보수’ 가치를 역사적 패륜자들의 개개 집단 이익 추구가 아니라, 민족국가의 이익을 ‘보수’한다는 가치로 전환해야 한다. 김종인 한나라당 비대위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이나 MB정부가 추구하는 ‘기득권의 보수’를 폐기하고, 민중의 삶을 보호하며 민족국가의 이익을 지키는 보수로 전환해야 한다. 이러한 전환을, 민족을 배반하고 외세에 의존하고 도덕적으로 망가진 세력에게 맡기면 또 다른 꼼수로 민중을 기만할 뿐이다. 민중의 권리(선거)로 역사적 패륜 집단을 심판할 때 비로소 보수의 의미를 민족과 민중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보수’와 ‘진보’ 개념과 그 적용은 역사논리와 모순된다. 서구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는 민족국가의 이익을 원칙으로 하는 가치체계를 ‘보수주의’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의 근대 정치사에서는 민족 이익을 앞세우는 가치체계를 ‘좌파진보주의’라 매도하며 폭력적 악법으로 처벌했다. 반면 외세에 의지하여 개인의 이익을 확장하는 기득권 집단이 ‘보수’라 자칭하고, 그 잘못된 논리 때문에 갖은 부패가 재생산되고 있다. 민중과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경제를 위하여 ‘수구 보수’는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양재혁 성균관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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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eskrasia
2012/01/10 02:35
어떠한 현실의 창조를 위해 이데올로기는 필수불가결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막연히 부정적인 단어로서만 받아들여지는 듯 하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정말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사실은 그래서 철학책들이 길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는 그 이상적인 사회상을 하나의 모델로서(이것이 이데올로기의 원래 뜻이다.) 사회에 내보여야만 한다. 실컷 '상식적인 사회'라느니, '정의로운 사회'라느니 이렇게 애매모호하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정치세계에 나오면 분명 많은 인기는 얻을 수 있으나, 결국 그들이 만들 수 있는 사회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의 문제제기(상식, 정의타령)로서는 유권자들이 그들의 피상적인 정보만으로 선택을 해야 하며, 공론장에서 그들의 모델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수정이 가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나중에 가서야 '또 속았다'느니, '역시 정치는 더럽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또 정당구조를 갈아엎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풍토에서는 정치가를 욕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 싫어하고 후안무치하며 무책임한 유권자들을 탓해야만 한다.(본인을 포함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귀신같이 쫓아다니는 것이 정치가의 본질이자 의무이니까.. 정치가들이 제대로 된,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정치현실에서 싸우게 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알 수가 있고, 공론장에서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 대한 공방을 벌일 수가 있다.

의외로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집단은 정당이다. '집단지성'은 사실 '트위터' 이런 데가 아니라 정당에서 발현되어야 한다.(트위터엔 있지도 않은 것 같지만;) 정당 내부에서 이상적인 사회상을 잘 만들어서 정치인과 함께 사회로 배출해야 하지만 한국의 정당들은 어떤 사람을 '잘 공천'해서 '잘 포장'해서 내보낼 것인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다.(이 점에서 정당의 개혁이 불가피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당정치 자체에 의구심을 갖고 아예 정당이 아닌 개인에 의존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에만 4천만개의 이데올로기를 세워 중구난방을 만들자는 것과 다름없다.

개인의 창의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나, 개인의 창의성의 한계는 개인개인마다의 결과물은 결국 단 1mm씩이라도 차이가 있다는 점에 있다. 이를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잘 구체화 해서 거기에 개인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통한 조각을 해야만 하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꼼.., 튓.. 등이 있을까?;;)은 막연함과 감정에'만' 의존하여 정치를 풀고자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방법대로라면 확실히 제2의 노무현은 나올 수 있다.(특히나 투표에 강한 사조이니만큼.. -_-;) '사람'에 가깝고 '상식'에 가까운. 그러나 그 '사람'에 '노동자'는 들어있지 않고, '상식'에 '노동', '환경', 'Progress' 등은 빠져있다. '상식'이라는 키워드가 때로 엄청나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이데올로기에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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